[理知논술/문학 숲 논술 꽃]역경에 처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

  • 입력 2008년 5월 26일 02시 58분


○ 인간은 때때로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에 처한다

프랑스 작가 A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페스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이 나타난다. 페스트는 중세 유럽을 휩쓴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그러나 단순히 전염병이라기보다는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갑자기 닥친 시련과 고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염병인 페스트처럼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 ‘페스트’에 나타난 인물들의 각기 다른 대응 모습을 살펴보면서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점검해 보자.



랑베르는 몹시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파리에 아내를 두고 온 것이었다. 정식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나 마찬가지였다. 시가 폐쇄되자 그는 곧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중략) 그러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얼마 동안이나 이 사태가 계속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개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도청의 비서실장과 접촉할 수 있었다(직업이 기자이고 보니 여러 가지 편의가 있었다). 자기는 오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일도 없고, 우연히 자기는 여기에 있게 되었고, 일단 나가서 격리 수용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퇴거를 허가해 주는 일이 마땅하리라고 그에게 말했다. (중략)

그달 말경에, 우리 시의 고위 성직자 측에서는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중략)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는 강론을 위촉받았던 것이다. (중략)

“오늘 페스트가 우리에게 닥쳐온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카뮈, ‘페스트’]

○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과 생각으로 위기상황에 대응한다

알제리에 취재차 잠시 들른 기자인 랑베르는 개인의 가치와 행복을 중시하는 이기적 인물로 볼 수 있다. 랑베르는 위기 상황에서 개인적 이유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 상황에서 빨리 탈출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 대처하기보다는 현실을 회피하는 모습에 가깝다. 이러한 회피는 오히려 문제 상황을 악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방인인 랑베르와 달리, 오랑 시에 살고 있는 인물인 파늘루 신부와 의사 리유는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결해 보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신문기자인 랑베르의 행동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파늘루 신부는 고통의 현상보다는 그 근본적 원인이나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통해 현실을 해결하려 한다. 그는 초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이에 비해 리유는 구체적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구체적 현실에서 고통 받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한다.


리유는 답답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다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있는 것은 페스트에도 역시 있습니다. 하기야 몇몇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구실도 하겠죠.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참상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결국……” 의사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타루를 물끄러미 보면서 또 주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 만큼, 아마 신으로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낫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카뮈, ‘페스트’]

위의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위기 상황에 반응한다. 하지만 누구의 행동이 옳다고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직업에 따라 역할이 다르고 외부인이냐 내부인이냐에 따라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들은 서로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현실에 투영된다. 서로 다른 입장들이 조화를 이룰 때만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 뜨거운 태양이 없으면 열매는 익지 않는다


비자반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중략)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중략)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이 기약치 않은 불측(不測)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龜裂)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木枕)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동안에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 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김소운, ‘특급품’]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에 있다. 문제가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침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되레 한 급(級)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사람 역시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자아를 한 단계 발전시킬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태도로 유연하게 대응해 나간다면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정 ㈜엘림에듀 대표 집필위원 엘림에듀 대치 직영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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