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우정열]선생님이 잠재적 범죄자?

  • 입력 2007년 12월 1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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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에게 명함을 건넬 때 나도 모르게 명함 뒷면을 가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교직에 봉사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알고 살았는데 비위신고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쓰라니 ‘잠재적 범법자’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최근 만난 서울 모 고교의 A 교감은 교감 승진 뒤 받은 명함을 보여 주며 울분을 토했다. 명함 뒷면에는 ‘맑은 서울교육-우리의 얼굴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비위신고’를 위한 서울시교육청 ‘클린신고센터’ 홈페이지와 부교육감과 감사관의 휴대전화 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서울 소재 초중고교 교장 교감들이 이런 명함을 쓰게 된 것은 지난해 국가청렴위원회의 정부산하기관 청렴도 조사에서 시교육청이 최하위를 기록하자 올 1월부터 ‘맑은 서울교육’ 캠페인을 벌이면서부터다. 당시 부교육감이던 현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이 도입에 앞장섰다는 후문이다.

시교육청은 교육청 연수를 받는 관내 각급 학교의 교장 교감을 상대로 이 같은 문구가 포함된 명함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학교비리 근절’을 위한 조치라지만 ‘나를 고발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명함을 건네야 하는 교육자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비교육적인 처사이자 전시행정이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일선 교장 교감들은 마지못해 이 명함을 쓰고 있지만 대부분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권고대로 만든 명함과 별개로 자비로 명함을 만들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권고일 뿐 강제사항이 아니고 교육비리를 근절하겠다는 상징적 조치로 봐 달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한재갑 대변인은 “교직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존중인데 이런 접근법은 너무 정치적이고 교사들을 얕보는 처사”라고 당장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한 중학교 교장은 “1998년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 시절 촌지를 근절한다며 교문에 ‘우리 학교는 촌지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게 해 교사들의 사기를 꺾고 원성을 샀던 때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교단의 잘못된 관행은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지만 이 작은 명함 하나 때문에 자괴감을 느낀다면 과연 교원들이 신바람이 나서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칠지 시교육청은 자문해 보길 바란다.

우정열 교육생활부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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