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내쫓은 언론인 취업까지 막았다”

  • 입력 2007년 10월 26일 03시 13분


코멘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신군부 언론통제 및 10·27 법난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불교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경청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신군부 언론통제 및 10·27 법난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불교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경청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軍과거사위,1980년 언론통제-10·27법난사건 진상조사 발표

1980년 당시 신군부가 언론인 강제 해직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그치지 않고 해직 언론인들의 성향에 등급을 매겨 취업 제한 조치까지 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같은 해 군과 경찰 병력이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곳을 수색하고 스님과 불교 관련 인사 등 153명을 강제 연행한 불교계 탄압 사태인 ‘10·27 법난(法難)사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5일 이 같은 내용의 신군부 언론 통제 및 10·27 법난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K-공작계획’으로 언론 회유=국방부 과거사위는 당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1980년 2월 신설한 정보처 산하에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한 ‘언론반’을 가동한 사실을 증명하는 ‘언론조종반 운영계획’ 문건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준위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전 사령관과 언론사주 및 중진간부 면담을 추진하는 ‘K-공작’을 통해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1980년 초부터 문화공보부 직원과 수집관 등 14명으로 구성된 K-공작반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1명 접촉비 10만 원, 1명 2, 3회 접촉’ 지침이 내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 과거사위 관계자는 “K-공작은 전두환을 최고 인물로 만들기 위한 언론공작으로 관련 문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K-공작의 일환으로 시행된 ‘보안사령관과 언론계 사장의 면담보고’ 문건에 따르면 신군부는 계엄기간 검열된 기사를 계엄 이후에도 게재하지 못하도록 사장들로부터 각서까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언론인 정화작업과 해직언론인 취업 제한=신군부가 비판 성향의 언론인들을 색출해 취업제한 등 불이익을 준 사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5월 언론인 정화 대상자를 A급(국시 부정 및 제작 거부 주동 등), B급(제작 거부 선동 및 부조리 행위자), C급(단순 제작 거부 동조) 등으로 나눠 문화공보부에 통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작성 주체와 일시가 명확하지 않은 ‘언론정화자 명단’ 문건에는 정화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수기(手記)로 적혀 있다.

정화 사유는 국시 부정(10명), 반정부(242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나 무능(123명) 등이며 109명은 이유가 빠져 있어 신군부의 입맛에 따라 작성됐음이 드러났다.

또 보안사는 해직언론인 711명에 대해 부국장 이상 42명은 1년, 부장 이하 627명은 6개월 동안 취업을 제한했고, 반정부 성향이 강한 42명에 대해선 ‘영구 취업 불허’ 조치를 취했다가 이후 A급(13명)은 영구 불허, B급(96명)은 1년, C급(602명)은 6개월로 취업 제한 기간을 바꿨다.

보안사 정보처 정보2과에서는 계엄 해제 이후에도 해직언론인 49명에 대해 A급(극렬비판 인물로 순화 불가능자), B급(비판활동 재개 가능성이 높은 자), C급(비판성향은 잠재해 있으나 특이 동향 없는 자), D급(문제성은 있지만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 중인 자)으로 분류해 동향을 파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안사의 영구 취업 불허와 해직 언론인들의 동향 파악 대상에는 동아일보 기자가 각각 5명, 4명 포함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