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사건 이후 기업들 채용기준 ‘간판보다 평판’으로

  • 입력 2007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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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직장 평가, 성과와 직결”

LG 이랜드 등 대기업들 경력직 채용에 적극 반영

조회 대행사 덩달아 활기 이직자는 “뒤캐기” 불쾌감

“간판은 속여도 평판(評判)은 못 속입니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인재개발팀 김모 부장은 최근 기업들의 경력사원 채용 과정에서 평판 조회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평판 조회란 직장을 옮기는 사람에 대해 이전 직장의 상사, 동료, 거래처 직원들이 어떤 평가를 하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기업들이 평판 조회에 관심을 보인 배경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사건 등이 작용했다. 더는 학력 등 ‘간판’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평판 조회가 활성화되면서 기업의 의뢰를 받아 조회를 대행하는 대행사들도 활기를 띠고 있다. 학력은 좋지 않아도 평판이 좋은 사람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옮기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 아예 면접부터 거절당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 평판 좋은 사람은 실력도 좋아

최근 이랜드 그룹 외식사업부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김모(31) 대리는 인상이 좋지 않아 면접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인사담당자들은 그를 탈락시키기로 거의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마지막 전형 절차였던 평판 조회 결과가 김 대리의 당락을 뒤집었다.

회사 안팎 지인들의 얘기, 평판 조회 대행사의 조사 결과 등을 통해 김 대리가 전 직장에서 탁월한 실력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겸비한 인재로 인정받았던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랜드 측은 “김 대리는 회사를 옮기자마자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려 회사를 ‘감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평판이 좋은 사람이 업무에서 회사를 실망시키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설명이다.

LG그룹 계열사 인사팀의 박모 팀장은 “신정아 사건이 터진 뒤 임직원들의 인사자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했다”며 “조사 결과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임직원의 경우 학력은 실력과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이전 직장에서의 평판은 성과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 경력자 이직의 성패, 평판이 결정

LG그룹의 한 계열사는 경력직을 채용할 때 평판 점수의 비중을 50%로 정해 놓고 있다.

이랜드 그룹은 최종 합격 여부를 평판 조회 결과에 따라 결정할 뿐 아니라 합격 후 연봉 계약을 할 때도 조회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요즘 경력사원을 뽑을 때 최종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평판 조회 결과다.

모든 전형을 마친 뒤 합격자를 잠정적으로 선정하지만 마지막 관문인 평판 조회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탈락시킨다.

이 밖의 많은 대기업이 경력사원을 뽑을 때 1차 면접 후보자 선정 과정부터 평판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고 점수를 매긴다. 평판 조회 결과가 좋은 사람들만 선별해 2차 임원면접에 들여보낸다.

○ 평판 조회에 백그라운드 체크 병행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이직 희망자의 평판 조회를 대행사나 헤드헌팅 업체에 맡기는 곳은 대기업 정도. 이 밖에는 채용 대상자의 동료, 상사 등과 인맥이 닿는 내부 직원을 통해 이전 직장에서의 평가를 알아보는 것이 보통이다.

헤드헌팅 업체나 평판 조회 대행사는 의뢰를 받으면 채용 대상자의 기본 정보를 모은 뒤 전 직장의 상사, 동료나 거래처 직원 중에서 최소 2명을 참고인으로 선정한다. 이들에게 의뢰 기업이 요구하는 질문을 하고 답변을 정리해 보고서 형태로 제출한다.

신정아 사건 이후에는 의뢰업체들이 평판 조회와 함께 대행사 등에 학력, 경력을 다시 한 번 검증하는 ‘백그라운드 체크’를 해 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

평판 조회 대행업체인 엔터웨이의 박운영 부사장은 “조사 과정에서 학력, 경력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무 기간이나 직책, 직급 등을 속이는 경우는 빈번히 발견된다”며 “일자리와 관련해 과거를 속이는 일이 아직도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평판 조회 허점도 있어

아직까지 한국의 이직 희망자들은 평판 조회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평판 조회 대행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뒤를 캐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내 평판을 알아보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적극 홍보하는 이직자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평판 조회 서비스가 국내에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아 대행업체나 기업 인사 담당자들의 ‘평가 기술’은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상황이다. 또 회사를 떠난 사람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부담스럽게 느껴 이를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황선길 잡코리아 컨설팅본부장은 “대상자의 주변 인물 몇 명과 10분 안팎의 전화 통화를 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다”면서 “이렇게 이뤄진 ‘수박 겉핥기’ 식 조회가 한 개인의 이직 기회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는 만큼 평판 조회를 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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