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입력 2007년 7월 3일 03시 02분


코멘트
그래픽 이혁재 기자
그래픽 이혁재 기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표작입니다.

마법세계로 들어간 소녀 ‘치히로’의 모험을 그린 이 영화는 낭만적인 이야기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펙터클을 통해 재미와 감동, 교훈의 ‘세 마리 토끼’를 잡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영화 속 기상천외한 마법의 세계는 현실에선 결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fantasy·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환상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따뜻한 대화를 나누도록 마술 같은 솜씨를 부리죠. 치히로가 겪는 판타지 세계는 단지 어린 소녀의 철없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난 같은 세계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을 새삼 일깨워주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입니다.▶easynonsul.com에 동영상 강의》

인간은 왜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에 몰두할까?

[1] 스토리 라인

열 살 소녀 치히로. 아빠 엄마와 함께 시골마을로 이사를 가던 치히로는 우연히 폐허가 된 놀이공원에 다다릅니다. 이상하게도 진수성찬이 차려진 그곳.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어치우던 아빠와 엄마는 갑자기 돼지로 변해 버리죠.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고만 치히로. 마법의 세계는 상대의 이름을 빼앗는 방식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는 마녀 유바바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치히로 역시 마녀에게 본명을 빼앗긴 채 ‘센’이라는 가짜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잘생긴 마법소년 ‘하쿠’를 만난 치히로는 하쿠의 조언에 따라 온천장 종업원으로 취직합니다.

밤만 되면 800만에 이르는 귀신들이 몸을 씻고 가는 온천장. 거기서 산전수전을 다 겪던 치히로는 어느 날 죽음을 눈앞에 둔 흰 용(龍)을 발견합니다. 용은 마녀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니바’가 건 저주의 주문에 걸려 있었지요.

용의 정체가 마법소년 하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치히로는 하쿠에게 걸린 저주의 마법을 풀어 주기 위해 제니바를 찾아갑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테마는 바로 ‘사랑’입니다. 치히로와 하쿠의 사랑 말입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을 단지 이성 간의 사랑으로만 보아선 곤란합니다. 용의 모습을 한 하쿠의 정체는 알고 보니 치히로가 어릴 적 신나게 뛰놀던 개천이었기 때문이죠. 결국 치히로와 하쿠의 사랑을 통해 이 영화는 인간과 자연이 나누는 교감과 사랑을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용(하쿠)의 머리를 안고 함께 하늘을 날던 치히로가 불현듯 하쿠의 본명을 떠올리면서 그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을 볼까요.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내가 어렸을 때 개천에 빠졌었는데, 지금 그 위에 아파트가 지어졌어. 그 개천 이름이 생각났어. 그게 바로 코하쿠야.”(치히로)

“나도 이제야 생각났어. 네가 내 안에 빠지자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하쿠)

바로 이 대목에 영화의 주제의식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습니다. 어릴 적 우정을 함께 나눴던 인간(치히로)과 자연(하쿠). 이 둘은 왜 그동안 서로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멀어졌던 걸까요?.

그건 치히로의 말 대로 인간의 개발 때문이었습니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개천(하쿠)을 마구잡이로 파괴해 버리고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버린 인간. 그러면서 인간은 자연과의 소통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에 몰두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도 영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탐욕’ 때문이죠.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허락 없이 음식을 마구 퍼먹던 아빠 엄마가 결국 돼지로 변해 버리고 말았듯,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은 스스로를 ‘탐욕(개발)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탐욕이라는 원죄는 인간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손에서 금붙이를 만들어 내는 일명 ‘얼굴 없는 귀신’. 이 귀신이 마구 쏟아내는 금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귀신들이 일제히 달려들면서 온천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마법세계의 모습도 탐욕으로 물든 인간사회와 다를 바 없죠.

[3] 종횡무진 생각하기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이런 유명한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아, 심장이 녹아버릴 만큼 로맨틱한 시구(詩句)죠. 원래는 무의미한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그’이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그는 ‘꽃’이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의 의미는 본래부터 사물 속에 내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물의 가치를 알아보고 또 그 사물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유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정말 흥미진진한 것은, 김춘수 시인의 시에 담긴 ‘이름=존재’의 메시지가 영화 ‘센과 치히로…’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법의 세계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마녀 유바바는 상대의 이름을 빼앗는 방식으로 그들을 지배합니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뜻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영화가 말해주고 있죠.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는 치히로에게 이런 말을 건넵니다.

“치히로라…. 좋은 이름이구나. 네 이름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단다.”

누군가의 이름은 곧 그가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힘없고 겁 많은 열 살 소녀 치히로가 무시무시한 마녀에 기적처럼 맞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치히로는 결국 하쿠의 본명까지 찾아줌으로써 하쿠를 마녀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 선조들에게 일본식으로 성(姓)과 이름을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이름을 빼앗아 버리면 우리 민족의 영혼과 존재 의미도 빼앗아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여러분, 이름이 있으면 존재하고 이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진 고생을 마다 않고 우리를 훌륭하게 키워낸 그들은 고작 ‘아줌마’라는 험한 이름으로 불리며 사회에서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오늘 어머니의 이름을 꼭 한 번 불러 보기 바랍니다. “사랑해요. 말순 씨”하고 말이죠. 그러면 어머니도 ‘꽃’이 될지 모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