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춤추는 대수사선

  • 입력 200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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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대수사선’은 1997년 일본 후지 TV에서 방영된 수사 시리즈물을 이듬해인 1998년 영화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 내 흥행 수입 100억 엔 (약 750억 원)을 돌파하면서 흥행 ‘대박’을 기록한 영화죠.

주인공인 아오시마 형사 역의 오다 유지는 특히나 매력적입니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정신 사나운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소시민적인 애환이 녹아 있지요.

기억나시죠?

경찰 부국장을 납치했던 19세 범인.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싸늘한 웃음과 함께 이런 짧은 말을 내뱉습니다.

“게임 오버.”

피가 마르는 긴장된 상황에서 범인은 왜 이런 장난스러운 한마디를 남겼을까요?

알고 보면, ‘춤추는 대수사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한마디에 응축돼 있습니다.》

[1] 스토리라인

어느 날, 조용하던 완강 경찰서가 난리가 납니다. 시체 한 구가 강에서 발견된 것이죠. 위(胃) 속에 테디베어 인형이 넣어진 채 강제로 봉합된 시체. 아오시마 형사는 이른바 ‘테디베어 살인’을 저지른 이 잔혹한 살인범의 흔적을 쫓습니다.

설상가상일까요? 더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청 요시다 부국장이 괴한들에게 납치된 것입니다. 완강 경찰서에 납치사건을 전담하기 위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됩니다. 중앙 경찰청에서 무로이(야나기바 도시로)를 비롯한 지휘부가 내려와 완강 경찰서를 접수하죠.

한편 아오시마는 인터넷 가상 살인 사이트의 운영자를 엽기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검거에 나섭니다. 예상과는 달리 용의자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어느 날 권총을 들고 제발로 완강 경찰서를 찾아온 이 여성은 범행을 자백하면서 한바탕 자살 소동을 벌인 끝에 붙잡힙니다.

반면 부국장 납치사건을 수사 중인 특별수사본부는 컴퓨터를 동원한 첨단 수사기법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합니다. 바로 이때 아오시마가 나섭니다. 납치범의 목소리가 담긴 전화 녹음테이프를 ‘테디베어 살인범’에게 들려주면서 “범인의 정체를 밝혀 달라”고 부탁합니다. 잔혹한 살인을 자행했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엽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부국장 납치사건과 ‘테디베어 살인사건’은 영화를 끌고 가는 두 개의 축입니다. 자, 두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지는 인물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이 공통점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에 접근하기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입니다.

부국장 납치사건의 범인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9세 청년 3명에다 회사원, 그리고 재수생 등 모두 5명입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만나 납치를 공모했습니다. 한편 배를 갈라 테디베어 인형을 집어넣고 꿰매어 버리는 잔인무도한 살인극의 범인은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살인을 자행하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인터넷 가상 살인사이트의 운영자였죠.

가공할 만한 두 사건을 저지른 범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보입니다. 첫째는 흉포한 전과자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들이란 것입니다. 둘째는 이들 범인이 인터넷이란 가상세계에 빠져 있으며, 인터넷이 사건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부국장 납치범이 “게임 오버(Game over·게임이 끝났네)”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의미심장합니다. 범인들은 마치 인터넷에서 가상의 게임을 벌이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엄청난 납치극을 기획·공모·실행했던 것이니까요. 당초 평범한 존재였던 범인들은 인터넷에 빠져 현실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채 차츰 가상세계의 볼모가 되었고, 결국엔 잔혹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 갔던 것입니다.

부국장 납치범의 전화 녹음테이프를 들은 ‘테디베어 살인범’이 아오시마 형사에게 들려주는 다음 한마디는 인터넷이 판을 치는 현대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건을 일으키는 게 아니야. 사건이 사람을 일으켜. 세상은 변했어. 그럴듯한 납치의 동기나 배후가 있을 거라 생각해? 너희가 오히려 사건을 더 복잡하게 만든 거야. 범인은 그냥 멍청하고 계획성 없고 철없는 어린애일 뿐이야.”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일으킨다.” 결국 이런 섬뜩한 사건을 일으키는 건 단순히 범인들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죠.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 물질문명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폐쇄적인 세계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소외된 개인’들을 양산해냈던 것입니다(이런 의미에서 납치범들이 은신해 있는 아파트를 소통이 단절되고 획일화된 비인간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영화에서 그려지는 특별수사본부는 현대 물질문명의 총아입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수사기법(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되고, 개인 무선통신과 수백 개의 폐쇄회로 TV를 통해 현대적인 수사를 펼치죠.

하지만 이런 번드르르한 문명의 외피를 한 꺼풀 걷어내 보면 이야기가 완전 달라집니다. 경찰 수뇌부는 학연과 엘리트주의로 물들어 있습니다. 자기만 공을 세우기 위해 타 부서엔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부서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습니다. 또 사건 해결보다는 경비 절감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전형적인 관료주의도 여전합니다.

현대문명이라는 ‘하드웨어’는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그 문명 속을 사는, 인간이란 이름의 ‘소프트웨어’는 이렇듯 곪아 터져 가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현대문명과 날로 사그라지는 인간의 온기. 양자(兩者)의 간극 속에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스스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바로, 휴머니즘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뜻에서 아오시마 형사와 무로이 참사관의 약속은 인간성이 증발되어 가는 현대사회를 다시금 촉촉하게 적셔 줄 한줄기 빛이요 희망입니다. 언제까지나 ‘현장’과 ‘인간’을 중시하자는 그 약속 말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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