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교과서로 논술 잡기]언어영역

  • 입력 2007년 4월 24일 03시 04분


코멘트
《‘교과서에 나오는 심화학습 문제에 통합교과형 논술 대비책이 숨어 있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과 논술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교과서를 통해 논술의 기초를 충분히 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교 교과서의 핵심 내용을 논술 준비 강의로 진행한다. 한 주는 사회와 과학, 한 주는 언어와 수리를 싣는다.》

주제: 빠름과 느림

국어 교과서 관련 단원과 글(국어-상 7단원): 헛기침으로 백 마디 말을 하다(이규태), 곡성역에서 만난 할아버지(공선옥), ‘생각의 속도’(빌게이츠)

교과서 다시 읽기

글 싣는 순서(언어)
1언어와 매체 특성
2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삶
3세계화와 우리
4부조리한 현실과 대응
5물질적 조건과 삶
6삶은 허무한가?
7사랑과 삶
8빠름과 느림
9가족을 말한다
10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의 미래
11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 환경
12희생, 사랑, 순종은여성의 미덕인가?
13욕망은 더러운 것인가?
14대학과 학문
15지식인의 역할과 사명
16노동은 천한 것인가?
17애국주의의 명암
18가난, 숙명? 자업자득?
19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
20희미한 옛사랑의 노래, 민주주의
21혼자만 살지 말고 같이 살자
22자연 친화, 도피? 은인자중?삶의 본연의 모습?
23영원한 소외 지대, 농촌
24예술은 면죄부일 수 있는가?

우중충한 그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며느리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다림질을 하고 있다. 이웃 방에 있던 시어머니가 말을 건네 온다.

“아가, 할미가 업어줄까.”

이 말은 할미가 젖을 빠는 손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비가 뿌리는 밖에 널려 있는 빨래를 빨리 거둬들이라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분부인 것이다. 며느리는 그 말을 통찰력으로 알아듣고 빨래를 거둬들인다.

텃밭에 가 남새 뜯어 국거리 마련하랴, 저녁밥 지으랴, 애들 돌보랴, 일손이 바쁜 며느리는 시어머니 담배 피고 있는 방 앞에서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거나 마루에서 노는 닭들에게 앙칼스레 욕을 퍼붓는다. 시어머니는 ‘옳거니’ 통찰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바구니 들고 남새밭에 가면 되건만, ‘그렇지 않아도 좀 쉬었다가 텃밭에 가려고 했는데 강아지 배때기를 차 …….’ 어디 가나 보라고 버티고 있으면 며느리는 업힌 아이 보고 “니 어머니는 무슨 팔자로 손이 세 개 달려도 모자르냐.”고 혼잣말을 한다.

이 같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대화를, 서구식으로 통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로 통역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나는 아이 업고 밥짓기가 바쁘니 나를 돕는 뜻에서 바구니 들고 남새밭에 가 국거리 좀 뜯어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응, 그러마. 나 지금 담배 한 대 피고 있으니 다 피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약 5분만 기다려 다오.”

“좋아요. 5분 후에는 약속대로 이행해 주시길 바래요. 꼭요.”

“알았다. 그렇게 하마.”

가정에서부터 나라라는 큰 집단까지 한국인은 너무 많이 통찰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이 통찰이 부드럽게 이뤄지면 빨래 걷는 며느리처럼 충돌 없이 행복하게 영위가 되지만, 남새밭에 가지 않는 시어머니처럼 통찰이 어긋나면 증오와 불화가 빚어진다.(이하 생략) [헛기침으로 백마디 말을 한다.(이규태 作) 중에서]

<문제> 소통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위의 글에 나타난 한국인의 의사소통 방식과 서구의 소통방식의 차이를 간략히 대비하시오.(400자 내외)

<생각해보기> 한국인의 의사표현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필자가 활용한 예에 나타난 며느리의 말이나 행동이 갖는 표현상의 특징을 필자가 예로 든 서구인의 대화에 나타난 표현상의 특징과 대비하여 볼 필요가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드러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한국적 방식과 서구의 방식을 대화의 길이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와 같이 두 소통방식을 표현 언어와 길이의 측면에서 대비하여 분석해 볼 뿐만 아니라 각각이 갖는 장단점을 비교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교과서를 활용한 실전논술]

제시문 (가)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서울 아들네.” “어디 사세요?” “목사동 대곡.”

대곡이라면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보성강 건너의 마을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시기가 여기서 서울 가는 길보다 더 힘드셨을 텐데요.”

시골의 교통편이라는 게 말할 수 없이 옹색하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할아버지가 대곡에서 여기 읍내 기차역까지 오신 그 여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에 이상하게 가슴이 아렸다. 더군다나 할아버지는 시골 노인네들 특유의 짐들을 바리바리 싸 짊어지지 않았는가. 나에게는 일면식도 없었던 할아버지지만,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나에게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 할아버지가 시골의 우리 부모님들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 열거해서 무엇하랴. 그 흙빛 같은 살빛이며 나무등걸 같은 손, 그냥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나는 그래서 가슴이 아렸다. 내 부모님 같아서, 그 영감님이 그냥 내 부모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게 느껴져서. 그런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할아버지는 예의 그 화롯불같이 따스한 미소를 입가에 묻히신 채로,

“괜찮어.” 했다. ‘괜찮어. 자식 보러 가는 길인데 뭐가 힘들어? 하나도 안 힘들어.’ 하지 않은 뒷말은 아마 틀림없이 그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대곡에서 어떻게 오셨는데요?” “대곡에서 석곡 가는 차가 다섯 시. 네 시 반에 저녁 먹고 다섯 시 차 타고 석곡 왔지.”

“그래서요?”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석곡서 읍내 가는 버스가 일곱 시에 있어서 기다렸다가 타고 왔지.” 할아버지는 천진하게 말했다. 천진무구하게.

“하나도 어려울 것 없어. 차시간에 맞춰 타고 왔지 뭐.”

“서울 가는 건 몇 시 기차예요?”

물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왜 이렇게 니 아부지 탄 기차가 안 온다냐고 말할 줄도 모르는 아들 녀석에게 푸념처럼 말을 건넸다. 자꾸 역사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 할아버지와의 대화에 슬슬 재미가 일고 있었다.

“열 한 시 사십 분.”

세상에나! 일곱 시 삼십 분에 역에 도착하여 그때부터 아홉 시 사십 분인 지금까지 줄창 이 자리에 이대로 앉아 계셨단 말인가. 그러고도 또 앞으로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아버지가 타고 갈 기차가 온다. 나는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다.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았다. 오후 네 시 반에 저녁을 잡숫고 출발하여 대곡에서 석곡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석곡에서 곡성 읍내까지 또 버스를 타고 와서 읍내 터미널에서 역전까지 또 짐을 짊어지고 걸어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작난로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시는 할아버지. 가슴이 턱 막히는 어떤 느낌,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 바로 그것이었다.

[공선옥 ‘곡성역에서 만난 할아버지’]

제시문(나)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나쁜 소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문제점을 파악하자마자 기업 내 모든 직원들을 즉각 각성시켜야 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용 가능한 지적역량을 결집하는 속도를 보고 우리는 그 기업을 평가할 수 있다. 기업의 디지털 신경망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 또한 직원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나쁜 소식을 찾아내고 그에 대처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디지털 기술은 어떤 긴급한 상황에서도 기업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과거에는 기업이 나쁜 소식에 대처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신속히 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전화뿐이었으므로. 경영자들은 종종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문제 해결에 나선 직원들은 필요한 정보를 찾느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뭉치와 씨름했거나,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알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 사내를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리고 일단 늦게나마 불완전한 정보라도 얻게 되면, 다시 전화로 서로 의논을 하거나 팩스로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이러한 과정마다에 매우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음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곳곳에 흩어진 관련 정보들을 모아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빌 게이츠, ‘생각의 속도’에서]

<문제> 제시문 (가)의 할아버지는 ‘느림’의 삶을, 제시문 (나)의 필자는 ‘빠름’의 삶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보여 주는 삶의 방식이 갖는 각각의 장단점을 쓰고, 제시문 (가)와 (나)를 참고하여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1000자 내외)

<생각해보기>

제시문 (가)의 할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아들네를 찾아가기 위해서 대곡에서 오후 4시 30분에 저녁을 먹고 다섯 시에 출발하는 석곡행 버스를 타고 석곡에 도착하여 석곡에서 출발하는 곡성읍으로 가는 버스를 7시에 타고 7시 30분에 곡성읍에 도착하였다. 그러고는 저녁 11시 40분에 출발한다는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지루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있다. 아들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와 기쁨이 그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기다리고 무거운 짐을 진 채 걸으면서도 할아버지를 힘들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러 간다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기쁨을 마음에 담고 그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비록 일의 진행이 빠르지는 않고 오히려 느리며 더디지만 그 느림 속에는 정신적 가치를 음미하고 깨달으며 창조할 수 있는 여유가 들어 있다.

이에 반해 빌 게이츠는 기업 운영을 위해 빠른 의사소통과 정보의 공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빠른 의사소통과 정보공유를 디지털 기술이 보장해 준다는 것이 빌 게이츠의 생각이다. 제시문 (나)의 필자 빌 게이츠는 아날로그 기술보다는 디지털 기술이 긴급한 상황에서도 기업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디지털 기술의 신속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빌 게이츠는 빠름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빠름과 느림,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인가?

※ 자세한 예시답안 및 참고자료는 홈페이지(http://www.easynonsul.com)를 참고하시오.

변성관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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