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빗장 연 ‘女權의 산실’…동아일보의 女風 사업들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코멘트
신문사상 첫 여성부장이었던 허영숙 씨(왼쪽)와 첫 여성월간지 ‘신가정’ 창간호.
신문사상 첫 여성부장이었던 허영숙 씨(왼쪽)와 첫 여성월간지 ‘신가정’ 창간호.
《“남녀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우리 조선의 여성이 남자의 지위와 대등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살림살이다운 살림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1925년 3월 20일 서울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열린 ‘전조선여자웅변대회’에서는 날카롭고 힘찬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양에서 온 김화진 여사가 ‘남녀평등을 부르짖노라’는 제목으로 첫 연설을 시작한 것이다. 이 행사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조선 최초의 여자 웅변대회였다. “조선의 처음일! 조선녀자의 첫소리!” “미(未)입장 3천여 명”이라는 당시 기사는 규중에 깊이 있던 여성들의 공개적인 등장에 얼마나 깊은 관심이 쏟아졌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당시 동아일보 사설(3월 19일자)에서는 “세계적 영향을 수(受)하야 여자의 언행을 일종 호기심으로 관망하던 보수적 사상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며 “다소 시기상조한 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조선여자웅변대회를 개최한 것은 일반의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대회 개최 취지를 밝혔다.

여성 법조인, 여성 최고경영자(CEO), 여성 프로골퍼…. 21세기 한국은 여성의 시대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의 역점 사업 중 하나는 바로 식민지 조선사회의 인습에 얽매여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여성’면을 고정으로 두고 ‘신여성과 교육’ ‘여성해방과 대가족제도’ ‘여성과 직업’ 등 여성의 권익 향상과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기획기사와 기고를 실었다. 창간 초기부터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계몽활동에 앞장선 동아일보의 궤적을 살펴본다.

○ 댕기머리 치마 휘날리며 스매싱…여성 지위 향상 신호탄

1923년 6월 30일 서울의 경성제1여고(현 경기여고) 운동장에 2만여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두 여자들과 나이든 남자뿐, 젊은 남성들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남자들은 학교 담장 위로 촘촘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에도 매달려 있었다. 나뭇가지가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면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비명과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제1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가 열린 날. 당시만 해도 남녀가 유별하고 여자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라 다 큰 여학생들이 라켓을 들고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코트를 누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자 주최 측은 ‘젊은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제야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동아일보가 그날 사설에서 밝힌 대로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고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마련한 대회였다. 실로 파격적으로, 그러나 한 세기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개최한 대회였다. 지금도 전국여자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이 대회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가장 오래된 사업이자 국내 스포츠를 통틀어 최장수 대회이기도 하다. 첫 대회가 열릴 당시는 유교적 전통이 굳어져 있었기에 이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4일 국내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후 첫 개인음악회를 열었다. 주인공은 여류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그의 남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일본 도쿄대 철학과 교수로 동아일보에 ‘조선 벗에게 정(呈)하는 서(書)’를 발표해 일본 지배하의 조선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던 친한(親韓) 인사였다. 우리 민족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그는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글을 본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서울 YMCA에서 열린 야나기 가네코 독창회에는 1300여 명의 청중이 몰려드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날 그녀가 부른 노래는 오페라 ‘미뇽’ 중의 아리아 등 15곡이었고, 피아노 반주는 신원직이 맡았다. 이 독창회는 황무지에 가까웠던 우리 양악계에 자극을 주었다. 1925년에는 춘원 이광수의 부인이자 여성 최초의 개업의(산부인과)였던 허영숙이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신문사상 첫 여성부장의 탄생이었다.

○ 첫 여성월간지 ‘신가정’ 주부들의 숨통 틔워 줘

동아일보는 1933년 1월 일간 신문사로서는 처음으로 여성 월간지 ‘신가정’(‘여성동아’의 전신)을 창간했다. ‘신가정’은 여성독자를 고려해 제목만 국한문을 섞어 쓰고, 그 외 모든 기사는 순 한글로 제작했다.

신가정은 여성지라는 특징을 살려 요리, 편물, 염색 등에 관한 각종 강습회를 열었다. 또한 부인 밤줍기 대회, 주부 야유회, 부인 고궁순례단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주부들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특히 1934년 6월 22일 ‘신가정’이 주최한 ‘공창문제 강연회’는 사회적인 반향이 컸다. 공창제도는 총독부가 만들었으며 당시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 강연회에서는 전문가들이 나서 ‘여성운동으로 본 공창문제’ ‘법으로 본 공창문제’ ‘의학으로 본 공창문제’를 주제로 강연했다. 신가정은 이와 더불어 ‘한글철자법 강습회’를 열어 여성의 문자 해독률을 높이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신가정’은 1967년 11월 ‘여성동아’로 이름을 바꿔 복간됐다. 1936년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의 여파로 폐간된 지 31년 만이었다. 여성동아는 1968년부터 ‘장편소설’ 공모를 통해 박완서 씨를 비롯해 이남희 윤명혜 우애령 안혜성 송은일 씨 등 여성작가를 발굴해 왔다. 매년 뛰어난 활동을 펼친 여성을 뽑는 ‘여성대상’에 연극배우 윤석화, 이해인 수녀, 소프라노 조수미, 작가 최명희 씨 등을 선정해 시상하기도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