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판결오류 인정… 사법史 다시쓰는 셈

  • 입력 2007년 2월 1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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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대법원 건물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보고서를 공개한 3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조형물에 대법원 건물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일그러진’ 대법원 건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보고서를 공개한 3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조형물에 대법원 건물이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 박영대 기자
대법원이 2005년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의 지시로 1년여에 걸친 조사와 자료 분석 작업 끝에 분류한 재심 청구 예상 사건 224건은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자체 판단한 사건이다.

그동안 당사자들에 의해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주장이 제기됐던 이들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형식으로든 공식적으로 오류를 인정하고 나설 때에는 ‘긴급조치 재판 판사 실명 공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파장이 예상된다.

▽224건의 분류 의미와 파장=대법원은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인 사건들이 하급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대법원까지 올라오면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결을 변경하고, 이들 사건에 대해서도 포괄적으로 사과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또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는 최종길 교수 사건의 예처럼 소멸 시효를 배척해 적극적인 국가배상을 명하는 대법원 판례가 나올 수도 있다.

대법원이 포괄적 해결방식을 검토하는 이유는 20∼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사건 당사자가 숨지는 등 재심 청구가 어려운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재심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서 개별 사건마다 일일이 ‘재심 청구→재심 개시 결정→재심’의 통상적인 과정을 거쳐서는 사법부의 조속한 과거사 정리가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실제로 1970, 80년대의 공안 시국사건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져 무죄 판결이 난 사건은 1980년 김대중 씨 내란음모사건, 간첩혐의를 썼던 함주명 씨 사건,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정도다. 현재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도 3건에 불과하다.

이러한 대법원의 생각은 사실상 한국의 사법사를 뒤엎는 것에 비견할 정도의 의미가 있다.

1970, 80년대에 사회적으로 파장이 컸던 이들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장 수사에 관여했던 옛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군보안사령부, 경찰, 검찰은 물론 잘못된 판결을 내린 법관에게까지 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진행된 과거 청산 작업의 완결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도 그 파장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논란은 사법부나 수사기관 차원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사건 목록 공개만으로도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이 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가 국론분열의 씨앗이 되면 당초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대법원장은 지난해에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생각을 했으나, 대법원 내의 만류 의견에 따라 이를 유보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선을 1년 앞둔 시점에 정치적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문제 판결 검토작업 등을 더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대선이 있는 올해에는 더더욱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래서 대법원은 독일처럼 특별법 제정을 통한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국회에 계류된 재심특별법안은 뒷전에 밀려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유신 시절 긴급조치 판결에 관여한 법관의 실명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사법부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대법원도 부득이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224건에는 어떤 사건이 있나=대법원은 1972∼87년 시국·공안사건 판결문과 사건기록, 시민사회단체, 인권단체, 사건 당사자 등의 주장을 토대로 ‘문제’의 판결을 분류했다. 간첩사건이 141건으로 가장 많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도 26건이 포함돼 있다.

대법원은 이들 사건의 재심이 청구되면 예상되는 쟁점으로 △고문 여부 △불법 구금 여부 △허위자백 여부 △국가기밀의 범위 △반국가단체 여부 등을 꼽았다.

대법원이 국회에 제출한 ‘사건 목록’에는 224건 중 절반 이상이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으로 돼 있다.

대표적 사건은 1981년 7월 발표된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 농협 직원이었던 박동운(당시 36세) 씨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됐다가 남파된 아버지를 따라 두 차례 북한에 다녀와 가족을 포섭하고 함께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 씨는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받아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4년 6월 제주항에서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 요원들에게 연행돼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보안분실에서 2개월여 조사를 받고 간첩으로 발표된 이장형 씨 사건 역시 재심 대상 사건으로 분류돼 있다. 이 씨는 2005년 8월 재심을 청구했으나 지난해 말 암으로 숨졌다. 67일간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씨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이었다.

1981년 간첩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된 재일동포 이헌치 씨 사건, 1983년 납북 어부 정영, 김정묵, 이상철 씨 사건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판결로 분류돼 있다.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가석방된 강희철(50) 씨 사건과 1980년 신군부의 광주민주화운동 탄압 실상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중형이 선고된 ‘아람회’ 사건은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다.

‘위장간첩’ 이수근 씨 사건에 연루돼 21년을 복역한 이 씨의 처조카 배경옥(67) 씨가 낸 재심 청구는 현재 심리가 진행되고 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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