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우리학교 논술 수업]서울 경희여고 철학 수업

  • 입력 2006년 12월 2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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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 경희여고 도서관. 철학 담당 윤상철 교사가 2학년 6반 학생들과 함께 철학자 로버트 노직에 관한 글을 짧고 쉬운 문장으로 요약해 나가고 있다. 제시문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면 쓰기의 80%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윤 교사의 생각이다. 홍진환 기자
18일 서울 경희여고 도서관. 철학 담당 윤상철 교사가 2학년 6반 학생들과 함께 철학자 로버트 노직에 관한 글을 짧고 쉬운 문장으로 요약해 나가고 있다. 제시문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면 쓰기의 80%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윤 교사의 생각이다. 홍진환 기자
《2008학년도 입시부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이 도입하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두고 일선 교사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마땅한 교재나 교수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과목을 넘나드는 논술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여간 고민이 큰 게 아니다. ‘이지논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알차게 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공교육 현장을 격주 시리즈로 소개한다.》

긴 문장을 쉬운 말로 축약… 글의 주제 캐내는 연습 반복

‘죽음의 트라이앵글.’

‘수능’ ‘내신’ ‘논술’을 각 꼭지점으로 하는 가상의 삼각형을 두고 수험생들이 붙인 이름이다. 수능(대입수학능력시험)과 내신과 논술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학생들의 현실적 고민과 두려움이 담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죽음의 삼각형’을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서울 경희여고 철학 담당 윤상철 교사의 논술수업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윤 교사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논술의 비법’은 “비법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윤 교사는 ‘주어진 것을 선용하라’는 그리스 속담을 논술교육의 철학으로 삼고 있다. 학생들이 이미 갖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왕도(王道)라는 주장이다.

학생들이 ‘수능’과 ‘내신’과 ‘논술’을 따로 떼어 인식하면서 논술을 별도로 공부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과목’으로 여기고 있는 게 문제라는 것. 윤 교사가 방과 후 특기적성 수업이 아닌, 철학교과 정규 수업시간에 논술을 가르치는 것도 이런 학생들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다. 시험문제의 형식(논술, 구술, 객관식 등)과 시험을 치르는 장소(대학, 고교)만 다를 뿐, 수능과 내신과 논술은 근본적으로 같은 교과 내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진단이다.

18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여고 도서관. 2학년 6반 학생 31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 교사의 철학수업이 진행됐다. 윤 교사는 자유주의의 시각에서 정의론을 전개한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이론을 설명하는 긴 글을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3개 문단, 총 13개 문장으로 이뤄진 글. 학생들에게 꼼꼼히 읽어보게 한 윤 교사는 먼저 문단을 기준으로 글을 세 토막으로 나눈 뒤, 다시 1개 문단을 문장에 따라 4개 내지 5개의 작은 토막으로 나눴다.

“언뜻 읽으면 글이 아주 어려운 내용을 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를 여러분들이 자주 사용하는 쉬운 말을 사용해 짧게 줄여 보세요.”

윤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한 문장씩 읽어가면서 쉬운 말로 요약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은 ‘노직이 주장하는 소유권 이론에 의하면 최초의 사유재산권은 자원에 대한 노동력 투입에 의해서 창출된 가치를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첫 문장을 두고 윤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요약해 나가는 과정.

①문장이 가장 강조하는 낱말을 먼저 찾아본다. 이 경우 ‘사유재산권’과 ‘노동력’이 중요한 단어다→②키워드를 이용해 긴 문장을 짧은 문장으로 축약해 본다→③결국 당초의 긴 문장은 ‘사유재산권은 노동에 의해 정당화 된다’는 짧은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런 방식으로 첫 번째 문단을 이루는 4개 문장을 각기 한 줄짜리 짧은 문장으로 줄였다. 윤 교사는 4개의 요약 문장을 다시 모은 뒤 이번엔 이들 4개의 요약 문장을 단 하나의 ‘더 짧은’ 문장으로 요약하는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결국 ‘어렵고도 긴’ 문장과 문단들은 어느새 ‘쉽고도 짧은’ 문장과 문단으로 요약되어 갔다. 그러자 글의 주제가 선명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이 한 작업은 논술시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로 주어진 제시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죠. 하지만 여러분은 대부분 글을 요약하면서 자기 힘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훈련을 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이 불러주는 요약문만을 암기하는 ‘수능 대비용’ 공부 습관을 들여온 겁니다. 이젠 문장 하나하나에 시비를 거십시오. 긴 문장을 발라서 짧은 문장으로, 짧은 문장에 살을 입혀 다시 긴 문장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다 보면, 동일한 교과 내용을 가지고 수능과 논술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윤 교사에 따르면, 학생들이 논술시험에 지레 겁을 먹는 이유는 △제시문 자체를 어렵게 느끼고 △제시문이 질문(논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제시문을 100% 정확하게 이해하는 연습만 제대로 하면 논술의 8할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학생들이 논술 쓰기를 두려워하는 것도 제시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뭘 써야 할지’ 망설이는 데서 비롯된다.

“‘읽기’만 된다면 ‘쓰기’는 해결됩니다. 논술은 ‘백일장’처럼 화려한 글쓰기 실력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제시문만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친구에게 편지 쓰는 정도의 수준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답안을 써낼 수 있습니다.”

“교과서를 소설책 읽듯 죽 읽어 나가며 이해하는 연습을 하라”는 윤 교사는 “많은 교사나 학생들이 간과해 버리는 교과서 내 ‘심화학습’이나 ‘수행평가문제’를 꼼꼼히 풀어보는 것이 논술에 대비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경희여고는 11월 윤 교사를 비롯한 교사 12명으로 ‘논술지원팀’을 구성했다. 철학 1명, 국어 3명, 사회 3명, 과학 2명, 수리 1명, 외국어(영어) 2명의 교사로 이뤄진 논술지원팀은 내년 1학기부터 각 과목 정규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논술 마인드’를 키워준다는 목표를 세우고, 효과적인 커리큘럼과 수업방식에 대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교과 내용 분석표
주제제목 저자과목/출판사
환경문제자연의 복원에 이바지하는 생태 윤리김준호<독서/천재> 154∼160쪽
멋진 신세계를 위한 새로운 생명 윤리최재천<독서/천재> 140∼143쪽
Ⅱ-1-(2) 환경과 윤리국정도서편찬위원회<시민윤리> 76∼81쪽
Ⅱ-1-(3) 생명존중과 환경보전의 윤리적 실천국정도서편찬위원회<시민윤리> 82∼84쪽
Ⅳ 환경우규환 외<과학/중앙교육> 335∼380쪽
Ⅳ-4 전통적 자연관과 자연 친화
(1) 조상들의 자연관
(2) 서구적 자연관과 환경문제
(3)인간과 자연의 조화
국정도서편찬위원회<전통윤리> 249∼262쪽
Ⅳ-1 환경문제의 확산
Ⅳ-2 지역개발과 환경보전
김재한 외<사회/법문사> 114∼133쪽
경희여고 윤상철 교사가 정리한 환경문제 교과내용 분석표. 윤 교사는 “통합교과형 논술의 해법은 교과서에 들어 있다”면서 “서로 다른 과목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내용을 뽑아 종합하면 통합교과적인 접근법을 터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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