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지혜의 숲]에피스테메와 독사(doxa)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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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황중환 기자
일러스트 황중환 기자
《논술의 핵심은 생각입니다.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력입니다. 선각자들의 위대한 생각과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눈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지논술’은 이번 호부터 철학 수학 과학 분야의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역사 속에 빛나는 철학 수학 과학자들의 생각을 오늘에 비춰 재해석하는 ‘콕콕! 생각의 길잡이’를 마련합니다. 철학칼럼은 매주, 수학과 과학은 격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철학자 수만큼 철학이 존재한다는데…

철학은 학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가 오늘날에는 많이 잊힌 것 같다. 그리하여 “철학자 수만큼의 철학이 있다”는 따위의 말들이 철학 개론서들에 버젓이 돌아다닌다. 철학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므로 무궁무진한 문제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모를까, 무궁무진한 수의 철학이 있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다. 가령 물리학의 논문들은 수도 없이 나오지만 그만큼 수의 물리학이 있다는 얘기는 없지 않은가? 물론 물리학에서도 큰 패러다임이 바뀔 수는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근대 물리학, 상대성 물리학, 양자 물리학 같은 변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리학자의 수만큼 물리학이 있다는 말을 물리학 개론서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철학에서는 왜 그런 말이 돌아다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철학이 학문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철학자들의 수만큼 있는 것도 아닌데 철학은 철학자들의 수만큼 있다면 그것은 철학자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양한 것은 물론 다양하지 않은 것보다 좋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다양한 것인지 다만 다양하게 보일 뿐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철학이 다양해진 것인지, 다만 철학으로 보일 뿐 사실은 전혀 엄밀한 학문이 아닌, 철학자 개인의 인생관에 불과한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각자가 세상을 보는 눈에 비친 바를 그리스어로 ‘독사(doxa)’라 한다. 그것은 ‘도케오(doke~o·보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각자에게 보이는 것, 각자의 의견, 견해, 사상, 인생관을 의미한다. 철학은 그러한 ‘독사’와 참된 앎, 즉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 학문)’를 구별했을 때 시작되었다. 민주정치를 하던 아테네에서는 온갖 사람이 온갖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스파르타에 의한 아테네의 패망이었다. 이를 지켜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다 참은 아니며, 그럴듯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양자를 구별해 줄 것인가?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의 본성에 따르느냐 아니냐의 기준이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에피스테메’라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본성에 따르는 주장을 하려면 존재를 탐구해야 한다. 사물 속에―이 ‘속’이라는 것이 핵심이다―있는 것을 끌어내어야 진실이 되는 것이지, 밖에서 자기 생각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한갓 ‘독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참된 철학과 각자의 사상에 불과한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어느 정도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료(데이터)에 충실했느냐에 달려 있다. 자료에 충실한 한 그렇게 많은 철학이 나올 수가 없다.

결국 철학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많은 책들이 사실은 사물에 충실한 철학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이나 체계를 사물에 투여한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독사’에 속지 않을 만큼의 지적 수준을 가져야 깨어 있는 국민이 되고, 또 그런 수준의 판단력으로 정치 지도자를 뽑아야 나라도 선진국이 될 것이다.

‘독사’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이 사안마다 거기에 맞게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관념에 생각을 고착시키고 그것에 따라 편먹고 싸우는 것이라면. 마르크스가 “철학은 이제부터 세계 해석이 아니라 세계 변혁”이라 했을 때, 그것은 자기가 변혁시키고 싶은 방향과 관념대로 철학을 몰고 가겠다는 선언이고, 따라서 그것은 사태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관이나 사상을 밖에서 덮어씌우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가난한 사람 없이 다 같이 잘 살자는 사상이 아무리 멋져 보여도 그런 방식으로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관념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삶이 관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절망이 아니라 고착된 관념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최화 경희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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