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된 성민아 엄마가 받았던 사랑 그대로 돌려줄게”

  • 입력 2006년 11월 4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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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관에서 미국 양부모를 만나 입양됐던 백경미 씨가 30년 만인 3일 다시 이곳을 찾아 박성민 군(가운데)을 아들로 맞았다. 왼쪽은 남편 제이슨 배튼 씨. 박영대 기자
1977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관에서 미국 양부모를 만나 입양됐던 백경미 씨가 30년 만인 3일 다시 이곳을 찾아 박성민 군(가운데)을 아들로 맞았다. 왼쪽은 남편 제이슨 배튼 씨. 박영대 기자
《3일 오전 4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회 게스트하우스. 새벽부터 잠에서 깬 백경미(미국명 에이미 캐스퍼·30) 씨와 남편 제이슨 배튼(30) 씨는 계속 방 안을 서성였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조금 후면 성민이를 만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네요.” 부부는 날이 밝자마자 아침 산책을 했다.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도 한잔 마셨다. 그래도 아직 9시. “시간 참 안 가네요.” 부부는 첫 만남이 있는 10시까지가 1년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1977년 한 살 때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아인 백 씨는 미국 위스콘신 주지사의 수석 법률 보좌관이다. 미국의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현재 주지사를 도와 주민이 500만 명 넘는 위스콘신 주의 법률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 백 씨가 30년 전 자신이 떠났던 한국의 복지관을 남편과 함께 다시 찾았다. 자신의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서다.

“입양이 확정되기까지 1년하고도 6주를 기다렸어요.”

지난달 입양할 아들 박성민(1) 군의 사진을 받고부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백 씨다.

“성민이를 만나면 어떤 감정일지 저도 모르겠어요. 눈물이 날지, 그저 마냥 행복할지….”

백 씨는 1976년 여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가난했던 그의 부모는 그를 동방사회복지회로 보냈다. 백 씨는 이듬해 4월 미국으로 입양됐다.

“(양)부모님에겐 이미 두 명의 친아들이 있었어요. 집에선 저만 입양아였죠. 하지만 전 가족 안에서 한번도 불행했던 적이 없어요. 부모님은 제가 집안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어린 시절 ‘백인들의 바다’에서 자라며 상처가 없진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항상 물었습니다. ‘넌 교환학생이니’부터 ‘왜 네 친부모는 널 버렸니’까지. 가끔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을 듣기도 했죠. 지겨웠어요.”

그는 자신을 ‘입양된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백 씨는 2001년 위스콘신대 로스쿨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동안 한국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무시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로스쿨을 마친 2001년에야 그는 부모님 손을 잡고 처음 한국을 찾았다.

“막상 한국에 오니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선 ‘관심’이 ‘애정’으로 변했죠.”

그는 그해 대학 시절 만난 배튼 씨와 결혼하며 한 가지를 제안했다.

“친자식을 낳아도 아이 한 명은 반드시 한국에서 입양하자고 했어요. 무엇보다 큰 기쁨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남편의 생각도 저와 같았어요.”

한참 얘기를 잇던 백 씨가 시계를 봤다. 오전 10시. 위탁모 박순연 씨가 성민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섰다.

“오, 하나님.”

첫마디를 내뱉은 백 씨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튼 씨는 아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한국말로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이 말을 1년간 연습했다.

“성민이를 입양하는 건 제 삶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거예요. 입양인으로서 제가 겪은 경험을 함께 나누고 이제껏 제가 받은 모든 사랑을 제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 줄 겁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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