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리 ‘라디오스타’ 추억 속으로 떠나다

  • 입력 2006년 10월 21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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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가수왕 최곤(박중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라디오 스타'. 18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미사리(경기 하남시)의 작은 카페 무대다. 그를 보며 "나 학창시절 때 저 오빠 왕 팬이었는데"라고 말하는 중년 관객들이 나온다. 영화는 추억의 한 자락을 꺼낸 듯 향수를 자극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7080 문화 밸리'로 알려진 미사리 카페촌은 더 이상 1970~1980년대 가수들의 무대가 아니다. 박미경 강수지 '디바' 등 1990년대 가수들이 출연한다는 간판이 즐비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이자 가수 윤시내가 운영하는 미사리 카페 '열애'도 통기타 선율 대신 핫팬츠 차림의 20대 여성 4명이 도나 서머의 '핫 스터프'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같은 무대가 끝나자 다른 곳에서 공연을 마치고 온 가수 윤시내가 나타났다. 1980년대 '열애', '공부합시다', 'DJ에게'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그녀는 7년 전부터 미사리에 정착했다. 분위기가 낯설다는 얘기를 하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만 해도 무조건 통기타 가수에 소박한 분위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젊은 손님들 위주로 댄스가수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가요계가 너무 빨리 변해 어제 TV에서 본 신세대 가수들이 미사리에서 공연하기도 해요. 7080 가수들도 이젠 많이 사라졌어요."

인터뷰 도중 5~6명의 아줌마 팬들이 윤시내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그녀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김연순(41) 씨는 "이젠 무조건 미사리로 가기보다 의정부, 인천 등 특정 가수가 공연하는 카페를 찾아 간다"고 말했다.

윤시내에게 "TV에 왜 출연하지 않느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신곡을 발표해도 사람들은 내게 예전 히트곡만 기대해요. 7080 가수들은 늘 '추억의 가수' 취급을 당하죠. 내가 설 무대가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서 한 동안 TV도 끊고 음악도 안 들었어요. 그래도 미사리 무대에 선 이후로는 마음이 참 편했는데…"

1996년 미사리 카페촌이 본격 형성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7080 가수들은 미사리를 떠나 인천 분당 의정부 등 서울 근교와 부산 대구 등 '전국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7080 문화 대신 'TV스타'를 찾는 젊은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1990년대 가수들이 미사리를 장악하고 있다. 카페 '아테네'의 이경훈 대표는 "통기타 라이브 문화에서 반주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비주얼' 문화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1988년 '사랑의 썰물'로 인기를 얻은 가수 임지훈. 그는 5년 전 미사리를 떠나 최근 안산의 한 카페에서 일주일에 세 번 공연을 가진다. 그는 "미사리에는 추억만 있을 뿐 마치 고여 있는 물 같다"며 "트로트, 댄스 가수들이 진출한 후 '미사리=7080' 공식도 깨졌다"고 말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7080' 문화가 마치 브랜드로 인정받았죠. 하지만 그 후 가수들이 너무 추억에 안주한 건 아닌가 생각도 들어요. 가수들이 앨범도 내고 콘서트도 지속적으로 해야 되는데 옛 추억만 되새기려 하는 듯 해서…"

1985년 '바람 바람 바람'으로 인기를 얻은 가수 김범룡도 6년 간 미사리 무대에 섰다가 현재는 인천 계양구의 '쉘부르'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과거만 해도 이선희, 조용필 팬 분들도 내가 노래를 부르면 환호해주었는데 지금은 손님들이 커피 값 비싸다고 불평만 한다"며 "갈수록 7080 가수들의 무대가 줄어들고 이에 스트레스를 받고 몸이 망가지는 동료들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사리에서 활동하는 7080 가수들 중 인순이 남진 박강성 심수봉 등이 A급 가수들. 이들의 몸값은 한달 출연에 대략 1억원 정도다. 이렇게 몸값 높은 가수들을 유치하다보니 커피 한 잔에 3만원을 받는 카페도 있지만 한 카페의 사장은 "4~5년 전 하루 300만원 이상 매출을 올렸으나 최근에는 하루 20여만원 밖에 못 번다"고 말할 정도로 운영난에 허덕이는 곳들도 있다.

'기차와 소나무'로 인기를 얻은 가수 이규석은 8년 째 미사리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는 "한 때 50여개의 카페가 즐비했던 미사리 촌이 큰 카페를 중심으로 합병, 현재 10여개의 카페만이 불을 밝히고 있다"며 "설자리를 잃은 7080 가수들은 살기 위해 전국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7080 가수들의 큰 소원은 '음반 발매'. 그러나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도 넘는 등 준비기간은 천차만별이다. 5년 만의 새 앨범을 준비 중인 윤시내, 10년 만에 앨범을 발표하는 이규석은 모두 "앨범을 빨리 발표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정도지만 오히려 조심스럽다"며 "오랜만에 컴백을 하는데 흐지부지 끝낼 순 없다보니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3년 만에 앨범을 발표한 임지훈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3년 만에 한 장씩 앨범을 내기로 스스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미사리의 서태지'라 불리며 미사리에서 전성기를 맞은 가수 박강성은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시점에서 추억만 되새기려 한다면 망하기 쉽상"이라며 "스스로 '옛날 가수'라 생각지 말고 가창력, 몸매, 심지어 개인기 등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변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7080도 한 물 갔나"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가수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나이에 인기, 음반 판매량에 목숨 거는 가수들은 거의 없어요. 방송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인기에 초월했기 때문이죠. 여전히 난 미사리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뿐이죠. 가수는 죽는 날 까지 노래해야하니까요." (윤시내)

“박미경, 듀크 출연” “웃찾사 개그맨 총출동”

미사리 카페촌 입구부터 귀와 눈을 사로잡는다. 박미경 강수지 리아 등 1990년대 가수부터 ‘디바’ 같은 여성 댄스그룹까지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 걸려있다. 한 쪽에서는 두 세 명의 남자들이 SBS 개그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의 개그맨들이 출연한다며 홍보하고 있었다.

미사리 카페촌의 ‘아테네’. 입구부터 홍경민의 댄스곡 ‘흔들린 우정’이 울려 퍼졌다. 현란한 조명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있었다. 카페는 이미 ‘나이트 클럽’으로 변해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무명 가수 5명이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5인조 남성 그룹 MCK입니다”라는 인사가 끝나자 이들은 ‘소몰이 창법’이라 불리는 리듬앤블루스 스타일로 마이클 볼튼과 ‘빅마마’의 노래를 불렀다. ‘동방신기’를 연상시키는 이들은 이어 싸이의 ‘환희’를 부르며 댄스 실력을 뽐냈다.

2003년 11월에 문을 연 이 카페는 20~30대 손님을 주고객으로 삼고 있다. 이경훈 대표는 “손님들은 더 이상 통기타 가수가 아닌 TV스타나 개인기 많은 연예인들을 보고 싶어 한다”며 “오디션을 보러오는 무명 가수들도 20대 초반의 스타를 흉내낼 정도”이라고 말했다.

손님들도 ‘미사리=통기타 문화’라는 개념을 지운 듯 하다. 직장인 양현욱(28) 씨는 “여자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다 분위기가 좋아 들렀다”며 “서울의 나이트 클럽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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