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엑스맨:최후의 전쟁

  • 입력 2006년 9월 1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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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맨’이라는 TV 오락 프로그램을 아시죠? 매력적인 남녀 연예인들이 나오는 게임 프로그램이죠. 자신들 속에 ‘X맨’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있는 단 한 명의 ‘간첩’을 가려내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X맨. 무리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행(潛行·몰래 행동함)하는 어떤 존재를 일컫는 이 말은 영화 ‘엑스맨’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런데 인간세상 속에 숨어사는 돌연변이들의 애환을 그린 이 영화 속 영웅들은 참 이상한 영웅들입니다.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끊임없이 저주하며 살아가니까요. 여러분, 혹시 아세요? 엑스맨은 사회적 소수에 대한 절묘한 비유란 사실을…. 오늘은 ‘엑스맨’ 시리즈 중 가장 지적이고 스펙터클한 ‘엑스맨: 최후의 전쟁’을 살펴볼게요.》

<1> 스토리라인

돌연변이 치료제인 ‘큐어’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큐어를 주사하면 ‘정상인’이 된다는 말에 돌연변이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많은 돌연변이들이 “돌연변이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며 반발하는 가운데, 그 동안 사회에서 갖은 억압을 받고 살아오던 일부 돌연변이들은 큐어를 통해 인간과 똑같은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죠.

인간과 돌연변이들 간의 갈등은 증폭됩니다. 결국 돌연변이들은 인간과의 평화공존을 꿈꾸는 엑스맨의 리더 ‘사비에’ 교수 진영과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매그니토’ 진영으로 양분됩니다.

한편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돌연변이 ‘진’이 살아 돌아옵니다. 하지만 진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분노의 초능력 때문에 사비에 교수를 죽이고 말죠. 매그니토 일행은 ‘큐어’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큐어’의 원천 성분을 지니고 있는 돌연변이 꼬마 ‘지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에 ‘울버린’과 ‘스톰’을 비롯한 사비에 교수의 제자들은 매그니토 일행에 맞서 마지막 전쟁에 나섭니다.

<2> 주제 및 키워드

돌연변이의 삶이란 어떤 건가요? 태어나면서부터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닌 탓에 인간과 다른 외모와 능력을 갖고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돌연변이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단지 인간과 ‘다를’ 뿐이죠. 하지만 인간들은 이런 돌연변이들을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차별하고 학대하며 심지어는 말살하려 하죠. 돌연변이들은 고통과 번민에 빠지면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보세요. △선택의 여지없이 남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고 △남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억압받으며 △그래서 자신의 타고난 모습과 능력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존재…. 이런 존재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있는 게 아닐까요?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흑인, 동성애자, 성전환자…. 이들은 태생적으로 남과 다른 외모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주류사회로부터 차별받는 운명을 감수해야 하죠. 그렇습니다. ‘엑스맨’의 돌연변이들은 바로 사회적 소수(마이너리티·minority)에 대한 알레고리(비유)였던 거죠. 결국 이 영화는 우리가 사회적 소수의 외로움과 슬픔을 껴안고 그들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주제로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더 깊게 생각하기

돌연변이들이 ‘사회적 소수’를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영화 속에선 더 많은 ‘숨은 상징’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선 ‘큐어’를 살펴볼까요. 인간들은 큐어를 ‘돌연변이 치료제’라고 표현합니다. ‘돌연변이’를 ‘치료’한다…. 이 말은 돌연변이가 곧 치료의 대상이란 뜻이죠. 결국 돌연변이를 질병(disease)으로 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입니다.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질병’인가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것이 과연 ‘아픈 것’일까요? 결국 ‘큐어’는 흑인이나 트랜스젠더와 같은 사회적 소수들을 ‘치료의 대상’, 즉 ‘환자’로 보는 주류사회의 편협한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상징이죠.

사비에 교수와 매그니토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소수인 돌연변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지만,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죠. 사비에 교수는 ‘돌연변이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반면 매그니토는 “돌연변이와 인간은 어차피 섞여 살 수 없는 만큼 인간에게 무력으로 맞서자”고 주장하죠.

이 대목에서 뭔가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들이 없나요? 맞습니다. 사비에 교수와 매그니토는 각각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지도자였던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말콤 X를 어쩔 수 없이 생각나게 하죠. 킹 목사가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한 데 반해, 이슬람교에 바탕을 두고 흑인 해방운동을 펼친 말콤 X는 ‘흑백 분리’를 통한 ‘흑인들의 독립’을 외쳤죠(이 영화의 원작인 미국 만화 ‘엑스맨’이 처음 발간된 시기도 1963년이었습니다).

<4> 뒤집어 생각하기

우리는 돌연변이들의 초능력에 대해 날카롭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울버린’을 볼까요. 그는 몸에 어떤 상처가 나더라도 금방 회복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능력 때문에 결코 인간들처럼 다치거나 죽을 수가 없죠. 울버린은 이런 자신의 능력을 오히려 저주합니다. 눈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붉은 광선을 쏟아내는 스콧 역시 자신을 저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 누구도 제대로 쳐다보아서는 안 되는 운명 때문에 늘 검은 선글라스 뒤로 진심의 눈을 감춘 채 살아가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어떤 특별한 능력(special power)이 ‘가치의 양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울버린과 스콧을 볼까요. 그들의 능력은 악당들을 쳐부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 자체로 ‘신이 내린 선물(gift)’이죠. 하지만 바로 그런 능력 탓에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저주(curse)’이기도 하죠. ‘엑스맨’은 소수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축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줍니다.

<5> 내 생각 말하기

요즘 이종격투기 K-1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최홍만을 아시죠? 그는 키가 218cm나 됩니다. 그는 큰 키를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큰 키를 부끄러워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최홍만 같은 ‘엑스맨’들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축복으로 여기고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또 박수쳐주는 사회야 말로 진정 건강한 사회가 아닐는지요.

이렇게 최홍만처럼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엑스맨’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들의 고민과 더불어 특별한 능력을 말해보는 것이 오늘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기억하시죠? 돌연변이 울버린은 제 몸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무릅쓴 채 파괴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또 다른 돌연변이 진에게 한발 한발 다가갑니다. 그러고는 그녀를 진심으로 안아주죠. 아, 소수가 지닌 외로움을 이해하고 품어줄 이는 또 다른 소수밖엔 없는 걸까요? 우리 사회가 진정 우리 사회 속 ‘엑스맨’들의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 안을 그날을 기다립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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