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판결문

  • 입력 2006년 8월 18일 21시 25분


코멘트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민사적 다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지금보다 건수가 적긴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유산상속과 토지소유권 등에 이견이 있으면 소송대리인을 앞세워 법원을 찾았다.

이 같은 생활상은 대법원 산하 법원도서관이 최근 펴낸 '일제시대 고등법원 판결록 민사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1912~14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이 내린 민사 관련 판결과 결정 등 112건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1심은 지방법원, 2심은 복심법원, 3심은 고등법원이 담당해 이 책은 현재의 대법원 판례집에 해당한다.

대법원은 지난해 '구한말 민사편결집'과 '일제시대 고등법원 판결록 형사편'을 발간했으며, 앞으로 판결문 국역 작업을 꾸준히 진행할 계획이다.

▽"경국대전보다 조선관습"=서울에 거주하는 A 씨는 1912년 첩인 B 씨가 자신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자 소송을 냈다.

"경국대전 등에 따르면 첩은 집안 흉사 때 상복(喪服)을 입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안 된다"는 것이 A 씨의 주장.

그러나 재판부는 "첩을 둘 때는 부부 관계와 같이 엄숙하고 정중한 절차가 필요하지 않아 한쪽이 자유롭게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아들이 죽자 할머니가 미성년자인 손자 소유의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낸 소송도 마찬가지다. "친권을 행사할 아버지가 없다고 해서 할머니가 그것을 행사하는 관습은 없다"면서 법원은 손자 편을 들었다.

첩의 자식 3명이 "아버지가 남긴 유산 대부분을 적자(嫡子)가 가져갔다"고 낸 소송에 대해 법원은 "장자가 유산을 상속받고, 나머지는 아들들은 장자로부터 유산을 분배 받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황제, 친일파, 개화파 모두 피소=일본인 구보다 씨는 1911년 11월 '을사오적' 이완용 소유의 전북 부안군 일도면 일대 논과 전답 3954 마지기(약 79만평)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서 원고가 승소해 이완용은 땅을 빼앗길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당시 위세가 대단했던 이완용은 소송대리인 2명을 내세워 최종심에서 판결을 뒤집었다.

이듬해 고등법원은 "구보다 씨는 토지소유권 분쟁은 관할 법원에 내도록 한 일본 민사소송법에 따라야 한다"면서 "관할법원인 공주지방재판소 대신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낸 것은 잘못"이라며 원심을 파기했다.

국권이 침탈된 후에는 구조선왕실도 소송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정모 씨는 1914년 "홍릉(명성황후의 묘)의 경계를 넓히는 과정에서 내 소유의 토지가 편입됐다"며 이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판결은 결국 왕실 소유로 결론 났지만 조선 백성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던 순종이 피소된 것. 순종은 판결문에서도 지위가 '창덕궁 이왕'(황제를 창덕궁에 사는 국왕으로 낮춰 부르는 말)으로 격하됐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박영효도 빌린 돈 3500원 때문에 소송에 휘말렸다. 1,2심에 이어 최종심에서도 패해 돈을 갚아야만 했다.

정원수기자 needj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