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法잣대도 업그레이드… 판례집으로 본 정보사회와 법

  • 입력 2006년 5월 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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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T) 혁명은 우리의 삶을 바꿔 놓았다. 삶이 바뀌면 법과 제도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오늘날 ‘돈’이자 ‘권력’인 지식과 정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다. 한국정보법학회(KAFIL·Korea Association For Informedia Law)가 출범 10주년을 맞아 22일 출간하는 ‘정보법 판례백선(Ⅰ)’을 통해 정보통신산업의 발달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꿔 놓았는지, 거기에 법과 제도가 어떻게 조응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IT의 발달은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세상을 보여 줬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과 다툼도 다양하고 새로워졌다. ‘정보법 판례백선(Ⅰ)’에는 새로운 다툼의 해결 기준이 되는 100개의 판례에 대한 비평이 실려 있다. 기업체 등 조직사회에서 인터넷 문화와 관련해 벌어졌던 특이한 분쟁과 그 처리 결과를 소개한다.

▽게시판 글의 명예훼손, 운영자 책임은?=인터넷 홈페이지의 전자게시판이 일상화되면서 게시판에 제 3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이 오르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런 경우 게시판 운영자는 문제의 글을 삭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게시판 운영자에게는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

그러나 판례백선에 소개된 한 판례는 문제가 된 글을 삭제해야 할 운영자가 삭제 의무를 이행할 수 없었던 예외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

2001년 4월 23일 한 지방자치단체의 인터넷 홈페이지 ‘방명록’에 한 공무원의 성추행과 뇌물수수를 주장한 폭로성 글이 올라 논란이 거셌다. 신문 등에도 보도됐다.

게시판 운영 책임이 있는 지자체는 이 글을 즉시 삭제하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2003년 6월 27일 지자체의 책임을 일부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애초의 폭로성 글로 피해를 본 당사자가 홈페이지의 다른 게시판에 반론을 게재해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일반적으로 게시판 운영자는 게시판에 올라온 문제의 글을 삭제해야 하지만 피해자가 전자게시판을 반론의 장으로 사용할 경우 운영자에게 일방적인 삭제 의무를 지우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가 e메일이나 채팅을 몰래 감시한다면?=인터넷의 발달은 개인 사생활에 대한 감시 및 파악도 용이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판례백선은 직장 상사가 수신이 완료된 부하직원의 e메일을 몰래 훔쳐본 경우와 학교의 감독 교사가 평교사의 메신저를 이용한 채팅을 실시간 감시하는 경우 형사처벌 결과를 비교해 놓았다.

두 경우 모두 훔쳐보거나 감시한 피고인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e메일을 훔쳐본 피고인에게는 정보통신망이용촉진법 등 위반 혐의가 적용됐고 채팅을 감시한 피고인에게는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이미 수신이 완료된 e메일은 ‘지금 막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어서 ‘현재성’을 띠지 않고 있기 때문에 통비법으로 금지된 감청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두 경우 모두 피고인인 직장 상사나 감독 교사는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직장 내 정보 유출을 막거나 직무 태만을 감시하고 조직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

그러나 법원은 감청이든 비밀 침해든 근본적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근 유명 사건 판례 다수 수록=판례백선에는 이 밖에도 인터넷 문화와 온라인 콘텐츠의 저작권 등 8가지 분야에 걸친 판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넥타이 디자인이 미술저작물에 해당하는지가 문제됐던 ‘히딩크 넥타이’ 사건과 P2P(개인 간 파일 공유)프로그램 운영자의 저작권 침해 방조책임이 문제됐던 ‘소리바다’ 사건, 음악 압축파일을 스트리밍 방식으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저작권을 침해하는지를 가렸던 ‘벅스뮤직’ 사건 등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비평이 실려 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판례집 낸 ‘정보법학회’

한국정보법학회(공동회장 최성준·崔成俊 특허법원 부장판사, 방석호·方碩晧 홍익대 법대 교수, www.kafil.or.kr)는 1996년 4월 창립됐다.

서울고법 황찬현(黃贊鉉) 부장판사가 10년 간 회장직을 맡아 오다 지난달부터 최 부장판사와 방 교수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현재 회원은 260여 명.

이 학회는 법조계의 다른 학회와 마찬가지로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IT 산업계의 간부급 실무자들이 전체 회원 수의 25% 정도를 차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보수적인 ‘법’이 나날이 변해가는 IT 산업의 발전상을 아우르기 위해선 업계와 신속하고 긴밀한 교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보법학회는 독특한 회원 구성을 바탕으로 10여 년간의 활발한 연구·토론 활동을 통해 IT 산업과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능동적인 법’의 영역을 개척해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황 부장판사는 ‘정보법 판례백선(Ⅰ)’(사진)의 출간에 대해 “40명의 집필진이 참여해 최신 판례를 중심으로 정보법학 전체를 아우른 드물고 귀중한 시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이 학회는 인터넷 저작물의 사용 계약이나 사용 허락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는 맞춤형 저작물 이용 약관을 누리꾼(네티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한국정보법학회의 다양한 활동은 법이 사람과 세상 가까이에서 유용하게 활용되는 사례를 보여준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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