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로 연구실 떠난 석-박사 ‘과학아줌마들’ 아이들 곁으로

  • 입력 2006년 4월 2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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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와룡동 국립서울과학관에서 공연 중인 과학연극 ‘보이지 않지만 움직여요’의 한 장면. 이 연극의 연출과 대본, 무대조명은 모두 여성 과학도들이 맡았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서울 종로구 와룡동 국립서울과학관에서 공연 중인 과학연극 ‘보이지 않지만 움직여요’의 한 장면. 이 연극의 연출과 대본, 무대조명은 모두 여성 과학도들이 맡았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무대 위에서 배우가 뜨거운 물이 든 컵에 붉은색, 차가운 물이 든 컵에 파란색 물감을 탄다. 뜨거운 물이 든 컵에 얇은 판을 대고 차가운 물이 든 컵 위에 거꾸로 세운다. 배우는 “두 컵 사이의 판을 치우면 물 색깔은 어떻게 될까요”라고 묻는다. 어린이 관객들은 “보라색요!”라고 외친다. 배우가 판을 살짝 치운다. 순간 객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희한하게도 물이 섞이지 않았다. 16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국립서울과학관. 3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보이지 않지만 움직여요’라는 제목의 과학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이 연극의 연출, 연기, 대본, 무대장치는 이공계 출신 ‘과학아줌마’들이 맡고 있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연구실을 떠났던 여성 과학인들이 어린이들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풀이해 주는 ‘과학 전도사’가 돼 돌아왔다.》

○ 직접 대본 쓰고 실험도구 자체 개발

다시 연극 무대.

배우는 반대로 차가운 물이 든 컵에 판을 대고 뜨거운 물이 든 컵 위에 거꾸로 세운 다음 판을 뺐다. 이번엔 위아래 물이 섞이면서 보랏빛으로 변했다. 어린이들이 “어!” 하며 탄성을 질렀다.

뜨거운 물은 밀도가 작아 위로, 차가운 물은 밀도가 커 아래로 움직이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실험에서만 물이 섞인 것이다.

‘아줌마’ 배우들은 50여 분간 펼쳐진 이 연극에서 밀도 차이 때문에 물이나 공기 같은 유체(流體)가 스스로 움직이는 대류(對流) 현상을 실험을 통해 보여 줬다.

연극을 관람한 한 초등학생은 “교과서보다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다”며 신이 났다.

짜임새 있는 과학 공연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학 지식이 필수다.

연극을 연출한 임주희(林主姬) 씨는 물리학 석사 출신. “대학 때 배운 일반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실험 틀을 만들고 직접 대본도 썼다”고 한다. 음향과 무대장치를 맡은 이경희(李景姬) 씨도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이들은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초등학생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생활과학교실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 연극은 생활과학교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든 것.

이 씨는 “과학 원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한 실험 방법과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며 “이공계 지식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 출산과 육아로 연구실 떠나는 여성 인력 많아

임 씨와 이 씨는 얼마 전까지 전업주부였다. 임 씨는 대학 강사로 일하다가, 이 씨는 이동통신 회사에 근무하다 출산과 육아 문제로 직장을 그만뒀다.

2004년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자연계 전공이 75.4%, 공학 전공이 77.2%로 비이공계(54.3%)보다 높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기에 접어든 20대 후반∼30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자연계 46.3%, 공학 50.5%로 뚝 떨어진다. 비이공계 여성이 30대에도 54.8%를 유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 여성 과학인 재취업 양성과정

과학기술부 산하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T)는 여성 과학인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 2004년부터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SC)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결혼이나 육아로 연구생활을 접은 이공계 출신 고학력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임 씨 등을 포함해 모두 49명이 수료했고, 현재 제3기 교육을 하고 있다.

수료생들은 대부분 30∼50대로 절반이 석박사급. 이들 중 41명이 국립서울과학관, YMCA, 한국과학문화재단, 동사무소 등에서 운영하는 생활과학교실 강사로 취업했다.

수학과 석사 출신 오승은(吳承恩) 씨는 “육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 한때 우울증까지 앓았다”며 “전공을 살려 과학강사로 일할 수 있게 돼 의욕이 생긴다”고 말했다.

전길자(錢吉子·이화여대 화학과 교수)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장은 “SC 과정이 서울, 대구, 충북 청주시에서만 이뤄지고 있는데 연내 두 군데 더 늘릴 계획”이라며 “과학강사 외에 과학관 큐레이터나 과학저술가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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