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우철]‘날치기 사학법’ 어떻게 할것인가

  • 입력 2005년 12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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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두 돌 지난 늦둥이 때문에 책을 덮어 놓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부모 자식 사이는 ‘천륜’이라는데 이것도 일종의 ‘자연법’을 체득하는 과정이라 한다면 법학도의 구차한 변명이 될까. 이제 막 ‘아니야’를 배운 딸아이는 의사소통의 폭이 현저히 넓어졌다. ‘맘마 아니야’는 ‘밥 안 먹어’라는 뜻이고, ‘뽀뽀 아니야’는 ‘뽀뽀하기 싫어’라는 뜻이며, ‘아빠 아니야’는 ‘아빠는 저리 가세요’라는 의미이다. 모든 부정은 ‘아니야’로 통한다고나 할까.

문득 독일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의 ‘주관적 공권 체계’ 가운데 한 문장이 떠올랐다. “부정의 힘은 더욱 강하다(negantis maior potestas)”라는.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손해를 피하는 쪽이 인간의 생존에 훨씬 절실하다는 증거일까. 법전 속 법들이 대부분 ‘금지’로 채워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일까. 정치의 세계에 대해 ‘아니야’를 외치는 브레이크 역할은 법을 다루는 사법부에 맡겨져 있다. ‘머릿수’의 계산 결과인 민주적 의사 결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므로 헌법재판이라는 ‘머리’의 판단으로 이를 걸러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늑대 두 마리와 토끼 한 마리가 모여 2 대 1로 토끼를 잡아먹기로 한 결정이 다수결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차기 선거에서 주민들의 표를 민감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고 정치적 경쟁자의 진입을 꺼릴 수밖에 없는 기성 의원들로서는, 헌법이 정한 가치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처럼 저지되지 못한 ‘불법한 법들’에 대해서는 ‘아니야’라고 휘슬을 불어 주는 심판이 있어야 한다. 로버트 달 같은 원로 정치학자의 예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위헌심사제를 유지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사립학교법의 날치기 통과를 보면서 필자는 김영삼 정부 시절의 노동관계법 날치기 통과를 떠올렸다. 가결하려는 쪽과 저지하려는 쪽의 ‘공수(攻守) 교대’가 있었을 뿐,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고 배제하여 급기야 모두 패자가 되고 마는, 날치기의 서글픈 본질은 조금도 달라진 바가 없다. 1997년 헌법재판소는 야당에 개회 일시조차 통지하지 않고 법안을 통과시킨 날치기에 대해 “헌법의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흠은 없다”면서 권한쟁의 청구를 기각했다. 만일 이때 헌법재판소가 ‘아니야’ 하고 과감히 휘슬을 불어 주었더라면!

교육기관으로서의 공공성을 완전 도외시한 채, 사립학교를 오직 설립자의 처분에 달린 ‘사유재산’으로 보려는 주장은 분명 한쪽의 극단이다. 사립학교가 처한 제각각의 상황을 무시한 채, 일률적으로 일정 비율의 외부 이사를 집어넣자는 주장 역시 다른 쪽의 극단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안을 도출해 내는 것이 우리 국회의원들에게는 그렇게나 어려운 고등수학이었던가. ‘머릿수’의 단순계산으로 득표에 불리한 쪽(사학재단)보다 유리한 쪽(교원단체)을 대변하려는 집권 여당은 과연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일까.

미국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윌리엄 에스크리지의 분석에 따르면 유권자는 입법의 이익보다 입법의 피해를 훨씬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피해의 기억은 더욱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들은 가급적 입법의 피해가 없거나 적어도 그것이 공중에 분산되도록 노력한다고 한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해야 할 입법부는 ‘긍정과 포용’으로 입법의 잠재적 피해자들을 설득해야지 ‘부정과 배제’로 이들을 추월해서는 안 된다. 법안의 통과가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여당 의원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매서운 겨울바람 못지않게 냉담한 국민의 시선에 괴로워하며 장외 투쟁에 여념이 없는 제1야당 의원들에게도 고언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보수’ 정당인지 ‘재야’ 정당인지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법 제도와 법질서의 권위를 누구보다 존중해야 할 보수 정당으로서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는 ‘응석’은 이젠 접을 때도 되었다. 사실상 날치기 통과의 ‘공동 정범’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무슨 낯으로 무엇을 호소하겠다는 말인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요, 정도라고 본다.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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