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총리 “추기경이 정치적 발언” 국회답변 따져보면…

  • 입력 2005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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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유신체제 내내 수배, 감옥생활을 했지만 당시 (우리를) 빨갱이로 몰던 사람들이 요즘 와서 이념,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살면서 별꼴 다 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가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을 통해 쏟아 낸 말들이 논란을 부르고 있다. ‘별꼴’과 같은 이 총리 특유의 독설적 표현은 그러려니 해도 그 발언 안에 담긴 생각이 독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최근 본보와의 특별회견(21일자 A1·3면 보도)에서 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발언 파문에 현 정부가 개입해 사건을 증폭시킨 데 대해 “우리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총리는 김 추기경의 충언을 ‘정파적 발언’으로 격하했다. 사실 최근 집권 세력의 행태가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면면에는 현 집권 세력 못잖게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이 포함돼 있지만 집권 세력은 이들을 한마디로 ‘민주화 세력을 빨갱이로 몰던 수구보수’로 낙인찍어 버리고 있다.

이 총리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가 그 같은 주장을 펴는 배경에는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마치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이뤄낸 독점물처럼 여기는 인식이 숨어 있다.

또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에 논리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상대가 자신들을 향해 어떤 비판도 할 자격이 없는 ‘부도덕한’ 부류이며, 그 비판에는 다른 ‘더러운’ 동기가 숨어 있다고 낙인찍어 버리는 ‘전투적 사고방식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신지호(申志鎬) 서강대 겸임교수는 “민주화는 다수의 국민이 이뤄 낸 성과물인데 현 집권 세력이 독점하려는 태도가 문제”라며 “현 상황을 비판하는 사람 중에 민주화 운동으로 고난을 겪었던 사람도 적지 않은데 현 정권은 무조건 ‘수구보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 金추기경과 민주화 운동

김수환 추기경이 국가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데 대해 이해찬 국무총리는 “종교지도자인 추기경이 상당히 정치적인 발언을 한것 같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김 추기경이 이번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말과 행동을 아끼지 않아 왔음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대다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추기경의 행동을 현 집권 세력처럼 “정치적(정파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74년 4월 유신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고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池學淳·1921∼93) 주교를 포함한 180명을 관련자로 구속 기소했다.

그러자 김 추기경은 지 주교를 면회한 뒤 유신정권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며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전국에서 신부 수백 명이 상경해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김재규(金載圭)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 찾아와 김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면담을 제안해 만남이 이뤄졌다.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과 정교(政敎) 분리, 노사 갈등 등의 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 냈다. 김 추기경은 또 박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젊은이들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죽이면 안 됩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며칠 후 감형 조치가 내려졌다.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인태(柳寅泰·열린우리당 의원), 이철(李哲·한국철도공사 사장), 이강철(李康哲·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 씨 등 현 여권 핵심 인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총리는 당시 유신체제 비방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 등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1개월을 복역했다.

서울 명동성당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의 성지’였다. 1987년 6월 항쟁이 본격화되기 직전 명동성당에 모인 시위대가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듬해인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운동 기념미사와 천주교 개신교 합동기도회에서 유신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문익환(文益煥) 목사 등과 문정현(文正鉉) 함세웅(咸世雄) 신부 등이 구속됐다. 김 추기경은 이 사건과 관련해 3·15 시국기도회를 열고 구속자들의 양심적 행위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들이 수감된 교도소를 찾아 용기를 북돋웠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구심점이자 성역이었다. 명동성당에 대한 경찰 투입이 임박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김 추기경은 정부 당국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이 밖에도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1978년) △오원춘 사건(1979년) △5·18민주화운동(1980년) 등 김 추기경이 인권과 민주화의 가치를 옹호하며 약자의 편에 선 사례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펴낸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나는 1970, 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고 말했다.

서강대 김녕(金寧·교양학부) 교수는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집인 ‘민족사와 명동성당’을 통해 “사회·정치적 참여를 옹호했던 이들이 교회 구성원의 다수는 아니었지만 적극적 소수와 김 추기경의 진보적 입장이 맞물려 한국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윤정국 문화전문기자 jkyoon@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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