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딸과 손발된 어머니 ‘마음의눈’으로 본 법정풍경

  • 입력 2005년 10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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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못 보는 전인옥 씨(오른쪽)와 그의 어머니 황효분 씨는 함께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상담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과정의 하나로 장애인들의 재판이 이뤄지는 법정을 자주 찾는다. 두 사람은 “장애인이 범죄의 피해자가 됐을 때 그들이 겪는 장애에 따라 처지나 심정이 다 다르다. 법원이 그 차이를 잘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앞을 못 보는 전인옥 씨(오른쪽)와 그의 어머니 황효분 씨는 함께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 상담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과정의 하나로 장애인들의 재판이 이뤄지는 법정을 자주 찾는다. 두 사람은 “장애인이 범죄의 피해자가 됐을 때 그들이 겪는 장애에 따라 처지나 심정이 다 다르다. 법원이 그 차이를 잘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법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해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전인옥(45·여) 씨와 그 딸의 눈이 되어온 어머니 황효분(75) 씨 모녀. 이들은 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법 형사3부 법정을 찾아 재판을 지켜본 뒤 이렇게 말했다.

이들 모녀는 장애인 성폭행 피해자 상담사가 되기 위해 함께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인데, 그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장애인 사건의 재판을 보기 위해 법원을 자주 찾는다. 이날 모녀가 ‘지켜본’ 재판은 정신지체(2급)를 앓고 있는 친딸(21)을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아버지(51)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 앞을 못 보는 시작장애인인 전 씨는 ‘마음으로’ 재판을 본다고 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어머니 황 씨가 설명해 주었다. 전 씨는 재판이 끝난 뒤 “사람들은 정신지체인들의 인지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범죄피해를 쉽게 잊어버릴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들에게는 정말 씻을 수 없는 상처”라고 말했다.

전 씨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법원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은 동사무소도 정말 친절해요. 비록 눈은 안 보이지만 동사무소에서 일을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법원에서 들리는 직원들의 목소리는 무척 고압적이라서 주눅 들 때가 많아요.”

어머니 황 씨는 딸에게 재판 정황을 귀엣말로 이야기하다 법정 경위한테서 “조용히 하라”며 면박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 씨는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귀에 더 의지해야 하는데 판사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판사가 몸을 뒤로 젖히면서 입이 마이크에서 멀어지다 보니 말소리가 작게 들린다며 어머니 황 씨가 설명을 보탰다. 전 씨는 “교육과정을 마친 뒤 상담사로 장애인 범죄피해 여성들을 만나게 될 때 ‘법은 만인한테 평등하니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고 싶어 법정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재판을 지켜보노라면 ‘법이 우리 장애인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은 가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한 장애인학교 교감이 같은 학교의 아홉 살 난 여학생을 장기간 성추행한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도 찾았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방청석에는 두 모녀밖에 없었다.

자신의 딸에게 몹쓸 짓을 한 교감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 법정 밖에 있던 피해 아동 어머니는 두 모녀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황 씨는 “장애아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끔찍한 일도 다 부모인 자기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며 “이 사람들한테는 법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성폭력피해자 상담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여성회 이낙영(李樂英) 회장은 “성폭력 피해를 본 장애 여성이나 가족들은 사회의 낙인이 무서워 외진 곳에서 홀로 싸우고 있다”며 “사건에 대한 정확한 진실규명과 피해자 인권을 위해서라도 수사 단계나 재판 과정에 장애인의 특성을 잘 아는 전문 상담사가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장애인 피해자에겐 더욱 세심한 배려를…▼


범죄의 피해자가 된 장애인들은 종종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정열(金正烈) 소장은 “장애인들은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에도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가 있다”고 23일 말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장애인들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지.

청각 장애를 가진 피해자 또는 피의자에게는 정확한 수화 통역 서비스가 중요하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더 힘들다.

시각 장애인에게도 의사 표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하다. 특히 시각 장애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정신지체를 겪고 있는 장애인의 진술에는 보호자나 변호인이 참석해 우선 심적으로 안정을 줘야 한다.

사법부 안에서도 장애인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변화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올 5월 정신지체 여성의 성폭행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보호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피해자를 위해 법정 출석이 아닌 수사 기록과 상담소가 제출한 영상자료를 중심으로 사건을 검토했다. 선고를 앞두고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을 법정이 아닌 판사 집무실에서 하도록 배려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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