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아이만 있는 가정]<上>급식당번이 두려워

  • 입력 2005년 10월 18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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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어려움보다는 ‘오죽하면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울까’라는 사회적 냉대가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 ‘싱글 대디’ 손영철 씨. 손 씨의 품에 안겨 잠든 딸 다빈이의 표정이 평화스럽다. 신원건 기자
육아의 어려움보다는 ‘오죽하면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울까’라는 사회적 냉대가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 ‘싱글 대디’ 손영철 씨. 손 씨의 품에 안겨 잠든 딸 다빈이의 표정이 평화스럽다. 신원건 기자
《이혼과 주부들의 가출이 늘면서 ‘싱글 맘(Single Mom)’ 못지않게 ‘싱글 대디(Single Daddy)’도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싱글 맘이 주로 경제적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면 싱글 대디는 이뿐만 아니라 가사, 자녀 양육, 교육 등 적응하기 힘든 새로운 역할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싱글 맘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녀 양육에 있어 사회적 냉대는 더욱 견디기 어렵다. 싱글 맘에 이어 싱글 대디와 그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을 살펴본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과 1학년인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는 김상민(가명·41) 씨는 두 아이가 갈수록 야위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이들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힘들다. 아이들 옷을 입히고 과제물을 챙겨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하루는 아들이 가정통신문을 주는데 엄마가 급식당번으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날 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외환위기, 사업 실패, 탈선 아내의 이혼 요구…. 3년 전 마지못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을 때만 해도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도 못했다.

경제적인 문제도 힘들지만 자녀 양육과 관련해 평생 겪어 보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매일같이 김 씨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

▽늘어나는 ‘싱글 대디’=통계청에 따르면 이혼과 아내 가출 등으로 남자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싱글 대디 가정은 2000년 22만4572가구에서 올해 24만2129가구로 꾸준히 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수치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싱글 대디 가정의 증가는 엄마들이 생활고나 부부 갈등을 예전처럼 인내만 하고 있지 않는 것이 큰 원인 중 하나이다. 경찰청 신고 기준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주부 가출자는 1만271명. 하루 평균 28명이 가정을 버린 셈이다.

한국복지재단에 등록된 소년소녀가장 4380명 중 어머니의 가출과 행방불명이 첫 원인이 돼 소년소녀가장이 된 아이는 올해 9월 말 현재 1783명으로 전체의 40.7%나 됐다. 어머니의 가출이 아버지의 동반 가출로 이어지면서 가족이 해체된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예전과는 달리 이혼 후 자녀 양육을 거부하는 엄마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여자들의 재혼이 빨라지는 반면, 남자들은 재혼 배우자감 부족 및 경제적인 문제로 싱글 대디로 남는 기간이 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힘겨운 엄마 역할=대다수 싱글 대디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자녀 양육과 가사 문제. 섬세한 사랑을 베풀지 못해 아이들이 정서불안을 겪는 것도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특히 취학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주로 엄마들 몫인 급식당번, 학부모회의, 소풍, 운동회 등 각종 교내 행사는 이들에게 고통이다. 엄마들 모임에서 교환되는 각종 교육정보도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5년 전 아내가 가출해 싱글 대디가 된 이광수(가명·38) 씨.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그는 최근 큰맘을 먹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다. 딸아이의 학교생활에 문제는 없는지, 공부는 제대로 하는지 몰라 갑갑했기 때문이다.

“다른 엄마들에게서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참석했죠. 하지만 엄마들 중 일부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여 공식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녀 교육을 사실상 방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도봉구 도봉2동사무소에서 ‘한 부모 가정’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 김미혜(金美惠·43) 사회복지사는 “특히 저소득층 싱글 대디는 자녀가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아예 교육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면서 “이때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아이가 많지만 많은 아빠가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 앓고만 있다”고 말했다.

▽“그 집에는 가지 마”=주변의 편견과 차가운 시선도 싱글 대디를 힘들게 하고 있다. 특히 사별이 아닌 이유로 싱글 대디가 된 경우 ‘남자가 오죽했으면…’이라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내의 불륜으로 4년여 전 이혼한 주성돈(가명·39) 씨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3학년 딸이 있다.

주 씨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자녀 양육에 전념한다는 결심을 하고 직장까지 접었다. 그동안 불과 200m 거리인 집과 슈퍼마켓, 학교만 오가며 나름대로 모범 아빠가 됐다고 자부하던 주 씨는 얼마 전 큰 상심에 빠졌다.

딸 친구들이 주 씨의 집에 한번 놀러오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이상해 하던 중 얼핏 아이들 얘기를 들은 것. 딸 친구네 아빠들이 주 씨의 집에는 절대 못 가게 막았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천혜정(千惠貞) 소비자인간발달학과 교수는 “이혼이 늘면서 싱글 대디가 더는 남의 일이 아닌데도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며 “싱글 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싱글 대디 교육 프로그램을 확충하는 등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육아일기 펴낸 ‘다빈이 아빠’ 손영철씨▼

“남자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이죠. 하지만 더 괴로운 것은 지하철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손영철(孫榮徹·35) 씨는 17개월 된 딸 다빈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 대디’다. 2003년 그와 결혼한 아내는 이듬해 다빈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이혼했다. 아내의 극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갓 세상에 나온 다빈이는 항문폐쇄증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명문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삼성의료원 생명과학연구소에서 일하다 벤처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해 억대의 빚까지 짊어진 상태였다.

“막막하더군요. 아이의 분유 타기부터 잠을 재우는 것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죠.”

그는 당장 육아상식을 얻기 위해 육아 관련 카페에 접속해 여러 글을 쓰며 도움을 호소했다. 100여 편의 글을 올리면서 아기 엄마들의 정보와 격려가 쏟아졌다. 옷 등 아기용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손 씨는 올해 1월 ‘즐거운 육아, 상큼한 나들이’(cafe.daum.net/smilebabies)라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회원만 3400명.

“가끔 딸아이를 보며 ‘엄마가 없는 아이’를 만들었음에 눈물이 나곤 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3400명의 다빈이 엄마를 얻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이죠. 다빈이는 제가 반, 나머지 반은 카페 회원이 키워준 셈입니다.”

올해 4월 자신의 육아일기를 담은 단행본 ‘울지마 다빈아’를 발표했고 연말에는 육아와 가정을 소재로 한 2번째 책을 낼 계획이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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