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격차]<下>어른도 아이도 '영어 스트레스'

  • 입력 2005년 10월 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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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영어 격차)’에 따른 사교육 경쟁으로 부모와 아이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어학연수, 조기유학 붐으로 인한 국부 유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영어의 효용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일각에서는 영어 공용화론까지 제기되고 있지만 반론도 적지 않다.

▽자녀 영어교육에 등골 휘는 부모들=서울 서초구 잠원동 H아파트 단지에는 입구마다 ‘가정방문 영어, 원어민과 1 대 1 대화’ ‘해외 유학 효과’라고 적힌 현수막이 요란하게 내걸려 있다.

최근 서울 강남 일대에서 유행하는 ‘튜터(tutor)’식 영어학습 광고다. 원어민이 가정을 방문해 1 대 1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으로 보통 1시간에 3만∼5만 원, 많게는 시간당 20만 원까지 받는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H아파트에 사는 주부 이모(36) 씨는 초등학교 2학년생, 5학년생 두 아이를 위해 학원비만 월 105만 원을 쓴다. 이 가운데 영어학원비가 40만 원으로 전체의 약 40%다. 이 씨는 “그나마 이 아파트 단지에서는 평균 수준이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강남 부모들의 영어교육 열풍은 불안감과 조바심을 동반한 채 다른 지역으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서울 중랑구 신내동 김모(35·여) 씨는 최근 생활설계사로 나섰다. 부족한 살림 때문에 그동안 직접 영어책을 들고 유치원생인 아들(6)을 가르쳤지만 옆집 아이 엄마가 영어 유치원, 학원, 그룹 과외 등으로 아이에게 월 82만 원을 쏟아 붓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김 씨는 “이대로 가다간 자식 대(代)에서도 인생 역전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들의 조기교육 열풍을 무모하다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 권오량(權五良)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한중일 고교생 영어능력 비교조사 결과보고’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운 고교 1년생이 그러지 않은 고교 2년생보다 읽기 듣기 쓰기 등 모든 영역에서 우수하다고 나타난 것.

고가의 영어교육 열풍 속에 국내 가계 교육비 지출액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00년 33%에서 지난해 41.3%로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영어 공용화 필요” vs “영어 과잉이다”=해외 비즈니스 기회가 많은 기업을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심지어 영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소설가 복거일(卜鉅一) 씨는 “영어는 이미 개인뿐 아니라 국가경쟁력의 핵심적인 척도가 됐다”며 “모든 국민이 돈 안 들이고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공용화론도 적극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재철(金在哲) 한국무역협회장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자질이 우수한 한국인이 한 개의 언어만 고집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정치권에서는 열린우리당 송영길(宋永吉) 의원을 중심으로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맘 놓고 국내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국가공인 영어연수원’을 법안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적지 않다. 바이오벤처 싸이제닉의 이희설(李熙卨) 사장은 “한국 경제가 제조업 중심의 모방 경제에서 지식기반 경제로 옮겨 가면서 ‘어떻게 팔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팔 것인가’가 관건이 됐다”며 “영어 능력보다는 창조력을 갖춘 인재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LG경제연구원 이춘근(李春根) 상무는 “해외 업무가 많은 직원들에게는 영어가 필수적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대다수 업무 능력에 결정적인 요인은 분석력과 창의력”이라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영어, 비싼 돈 들인다고 실력이 느는 건 아니다▼

《영어교육에도 ‘투자비=실력’이란 공식이 성립할까. 교육 전문가 대부분은 ‘노(No)’라고 말한다. 이들은 현재 영어교육 열기가 과열됐다고 진단하면서도 학교 수업만으로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광주교대 김영현(金英鉉) 교수는 “공교육의 영어 수업이 외국어로서 영어를 익히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면서도 “그러나 적절한 선행 교육에다 공교육의 장점을 잘 활용하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 영어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일찍, 재미있게=뇌 과학의 발달로 어릴 때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또 두 언어를 습득하면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익훈어학원의 이익훈(李益薰) 원장은 “유아기 영어교육 때 원칙에 따라 재미를 붙여 주면 나중에 힘들여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아이에게 알파벳과 발음기호를 가르친 다음 큰 소리로 읽게 하는 것에서 아이의 영어 공부를 시작하라는 것. 다음으로 수시로 카세트테이프, 비디오 등을 틀어 준다. 이때 가르친다는 개념보다 아이가 영어에 친숙해지도록 돕는다. 아이에게 ‘굿모닝’ 등 간단한 문장을 되풀이해 말하도록 하며 잘할 때마다 박수를 보내는 것도 잊지 말 것.

뇌 과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동기, 즐거움, 학습 능력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아이에게 영어를 강요하면 안 된다.

▽초등학교에서는 이렇게=많은 학원 강사와 영어책 저자들이 영어 공부의 비법(秘法)을 강조하지만 교육학 전문가들은 “영어에 노출되는 시간과 개별적 특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울시교육청의 최춘옥(崔春玉) 장학사는 “현재 각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특기적성 교육과 시범사업 ‘방과 후 학교’를 활용하면 무료 또는 저가에 학원 이상의 수업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각 학교의 원어민 보조 교사와 영어특구(English Only Zone)를 잘 이용하라고 권했다. 원어민 보조 교사나 영어 전담 교사 등에게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과 자신이 공부하기에 적합한 인터넷 사이트를 추천받아 이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인터넷에는 이야기 프로그램과 발음 따라하기 프로그램이 담긴 홈페이지가 있으며 이들 교사에게서 우수한 홈페이지를 추천받을 수 있다.

교육방송(EBS)의 라디오, TV, 인터넷 프로그램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도 좋으며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영어 책이나 CD, DVD 등을 사 주는 것도 동기 부여에 좋다.

아이가 영어에 자신이 붙고 성취 지향적인 태도를 보일 때에는 각급 교육청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영어 연극, 발표, 노래 부르기, 이야기 대회 등에 참가하게 한다.

자녀의 영어 수준이 일정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면 쓰기와 읽기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준다. 특히 쓰기의 경우 한 주제에 대해 짧아도 구조가 완성된 글을 쓰도록 지도한다.

어느 수준을 넘어선 아이들이 수업 내용을 경시하지 않도록 미리 말해 놓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수업시간에는 ‘아는 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한다.

이성주 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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