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테이프 압수]DJ정부 도청 ‘확실한 물증’ 가능성

  • 입력 2005년 9월 27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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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당시 국회서 만난 신건 원장과 정형근 의원2002년 10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오른쪽)이 국가정보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한 뒤 신건 당시 국정원장과 국회 정보위원장실에서 조우했다. 도청 의혹을 부인한 신 원장과 정 의원이 서로를 외면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2년 당시 국회서 만난 신건 원장과 정형근 의원
2002년 10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오른쪽)이 국가정보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한 뒤 신건 당시 국정원장과 국회 정보위원장실에서 조우했다. 도청 의혹을 부인한 신 원장과 정 의원이 서로를 외면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도청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최근 전직 국가정보원 중간 간부의 집에서 압수한 녹음테이프의 실체는 무엇일까.

검찰은 테이프 압수 사실은 공개하면서도 테이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내부적으로 이 테이프가 2002년 3월 정권 핵심 인사와 모 방송사 사장이 특정 대선주자 지원 여부 문제를 논의하는 내용이 담긴 불법 도청 테이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테이프는 2002년 대선 전 한나라당이 폭로한 ‘국정원 도청 자료’의 또 다른 물증이 되는 셈이다. 당시 폭로된 문건에는 이와 똑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당시 폭로된 문건과 이번에 검찰이 압수한 테이프는 ‘문건’과 ‘테이프’라는 형식만 다를 뿐 ‘뿌리가 같은(똑같은 도청 결과로 얻어진)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는 또한 2002년 대통령선거 전 한나라당 의원들이 폭로한 ‘국정원 도청 자료’ 문건에 대해 국정원 직원들이 자신들이 작성한 것이라고 자백했다는 본보 26일자 보도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물증도 된다.

황교안(黃敎安)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이 테이프는 검찰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테이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느냐는 것. 지금까지 진행된 검찰 수사 결과 도청 테이프가 만들어진 것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의 비밀 도청 조직인 미림팀에 의한 것이 유일하다.

따라서 문제의 테이프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면 국정원 차원에서도 도청 테이프를 제작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어서 큰 파문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테이프의 제작 경로도 쟁점. 검찰은 감청장비에 의한 불법 감청과 대화 내용 도청 방식 등 2가지 가능성을 모두 상정해 수사를 하고 있다.

‘R-2’나 ‘카스(CAS)’ 등의 감청장비로 입수한 내용이 테이프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지난달 5일 국정원이 발표한 자체 조사 결과가 뒤집히는 셈이다.

당시 국정원은 “감청 자료는 1995년 9월 이후 PC에 파일 형태로 자동 저장됐고 1개월 뒤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시스템화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대화를 엿들어 도청 테이프를 만든 것으로 드러난다면 옛 안기부가 요인들을 도청한 방식을 국정원이 고수했다는 결과가 된다. 국정원은 지난달 발표에서 “1997년 대선 직전인 11월 미림팀 활동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테이프 외에 도청 테이프가 더 있는지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PK서 反DJ정서 극복하면 盧후보 당선”

2002년 11월 28일 당시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이 공개한 A4 용지 27장 분량의 문건에는 국가정보원이 여야 정치인과 언론사 사장, 일선 기자, 기업인 등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도청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도청 시기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002년 3월 8일부터 28일까지. 이른바 ‘노풍(盧風)’이 불면서 노무현(盧武鉉) 경선후보가 뜰 때였다. 실제 노 후보의 이름이 도청 자료 곳곳에서 등장했다.

이 문건에는 당시 정권 핵심인사가 모 방송사 사장에게 노 후보 지원을 요청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인사가 3월 23일 방송사 사장에게 ‘노무현 후보가 PK(부산·경남)지역에서 반(反)DJ(김대중 전 대통령) 정서만 극복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이 높다’며 지원을 요청한 내용이다.

이에 방송사 사장이 ‘(노 후보가 좌파 성향을 보여 우익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는)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노 후보가 가장 말을 잘 듣는 김원기(현 국회의장)를 통해 노 후보를 중도 또는 우파로 돌려야 한다’는 반응을 나타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검찰이 26일 압수했다고 밝힌 도청 테이프에는 김 총장이 공개한 도청 문건의 일부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국정원의 도청 자체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도 새롭게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 총장은 당시 “국정원의 내부 자료를 입수했다. 구체적인 입수 경로는 내부 고발자 보호를 위해 밝힐 수 없다”고 밝혔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정형근(鄭亨根) 의원이 ‘배후’로 지목됐다.

정보통인 정 의원이 국정원 측에서 자료를 입수해 몇 달간 보관해 오다 노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후보와의 전격적인 단일화 성사 후 ‘제2의 노풍’이 불 조짐이 일자 문건을 폭로하도록 했다는 것.

그러나 정 의원은 “그 문건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해 왔고, 김 총장도 출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끝내 출처는 드러나지 않았고 대선이 끝난 뒤 도청 공방도 유야무야 됐다.

하지만 그 이후 국정원에서는 “우리가 도청한 게 맞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26일 “한나라당이 폭로한 도청 문건은 국정원 문서 양식과 활자체는 다르지만 내용은 맞았다. 누군가 도청 자료를 메모한 뒤 문건으로 작성해 한나라당으로 넘겨줬거나 한나라당이 국정원 직원에게서 메모를 넘겨받아 다시 편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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