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청계천 24시 “삶이 바뀐다”

  • 입력 2005년 9월 23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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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숲을 가로 지르며 도심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청계천의 낮(아래)과 밤. 캐논 EOS 1Ds Mark II 카메라와 15mm 어안렌즈로 청계천 광통교 주변의 낮과 밤 풍경을 촬영해 재구성했다. 변영욱 기자
빌딩 숲을 가로 지르며 도심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청계천의 낮(아래)과 밤. 캐논 EOS 1Ds Mark II 카메라와 15mm 어안렌즈로 청계천 광통교 주변의 낮과 밤 풍경을 촬영해 재구성했다. 변영욱 기자
《꽃 피고 물고기가 뛰어 오르는 청계천.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조선시대 ‘개천(開川)’으로 불렸던 청계천이 다시 물길을 열었다. 1961년 콘크리트로 덮힌 지 44년만이다.

열린 물길 따라 도심의 하늘도 열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열린다. 물길은 빌딩 숲속을 가로지르며 아스팔트 도시에 향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의 삶도 바꾸고 있다. 그래서 청계천은 작지만 크다.

다음달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를 앞둔 14일 하루 ‘청계천 24시’를 스케치했다.》

○ 청계천의 힘

청계천은 공사 과정에서 피라미와 잉어가 헤엄치고, 물총새와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오는 복원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는 청계천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오후 2시 광통교 입구에서 만난 양영수(38) 김윤희(37) 씨 부부는 ‘놀랍다’며 말문을 열었다. 2000년 이민을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이들은 “2003년 잠시 방문했을 때 청계고가의 상판을 떼어내는 것을 봤다”며 “2년 만에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바뀐 느낌”이라고 말했다.

같은 곳에서 만난 이희정(42·경기 안양시) 씨는 청계천이 끝나는 성동구 마장동 신답철교에서 1시간 넘게 걸어왔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어물을 사러 중부시장에 가는 길에 청계천을 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왔다. 어릴 때 청계천에서 발가벗은 채 멱 감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윤영로 씨·79·경기 수원시)

○ 청계천, 세상과 세대를 연결하는 실핏줄

청계천은 원래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건천(乾川)이다. 복원된 곳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광장에서 신답철교까지 5.84km. 서울 광진구 자양 취수장 등에서 하루 12만 t의 물을 끌어들여 폭 6∼8m, 수심 40cm 안팎을 유지한다.

놀라운 것은 한 자가 조금 넘는 깊이의 청계천이 거리와 거리, 세대와 세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소통의 실핏줄’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길은 지나가는 사람에 따라 나이를 먹는다.

청계천은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들어선 뒤 사람과 마음의 흐름을 끊는 곳이 됐다. 40대 이상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지만 20, 30대에게는 교통 체증으로 짜증나는 북새통이었다. 그러나 복원된 청계천은 이들을 소통시켜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 SC제일은행 강혜정(34) 대리는 “청진동과 인사동 주변에서 주로 점심을 먹었는데 이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서울파이낸스센터나 무교동으로 간다”며 “청계천은 서울이라는 삭막한 도시에 생기를 돌게 하는 허파같다”고 말했다.

오후 2시반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주환(69·중구 신당동) 씨는 “몸 상태가 좋을 때는 신당동에서 출발해 청계천을 거쳐 탑골 공원으로 온다”며 “공원에만 있을 때에는 갇힌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산책하는 재미가 생겼다”고 밝혔다.

오후 2시 45분. 청계천 수위를 재던 관수교 쪽도 극장통으로 되살아나는 기미가 역력했다. 종로3가의 극장에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청계천으로 향한다.

어학 공부 때문에 관철동을 자주 찾는 이동윤(27) 씨는 “종로3가에서 영화를 보고 관철동에서 맥주를 마신 뒤 청계천을 산책하는 길을 새로운 데이트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 새로운 청계천 라이프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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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은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있다.

낮 12시부터 오후 1시 반까지 비즈니스 빌딩이 밀집된 모전교에서 광교까지 직장인의 점심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넥타이 차림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나온 직장인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빌딩에서 일하는 예금보험공사 김경동(29) 씨는 청계천변에서 근무하고 식사하고 데이트도 즐기는 ‘청계천족(族)’이 됐다. 그는 “밥 먹고 커피 한 잔 마신 뒤 서둘러 사무실에 들어갔지만 요즘에는 점심 식사 뒤 동료들과 자주 산책한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해운회사인 한국머스크 고성현(42) 씨도 직장인 7, 8명과 산책하고 있었다. 그는 “거래처 담당자의 제안으로 점심을 먹은 뒤 30분 코스로 청계천을 둘러보고 있다”며 “청계천이 뜻밖에 비즈니스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20, 30대가 몰리는 두산타워와 밀리오레 등 동대문 패션타운 마니아들의 청계천 이동도 두드러진다.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는 이수민(23) 씨는 “‘두타’ 등 의류 매장에서 쇼핑한 뒤 청계천변의 중고 서점에서 패션 잡지를 샀었는데 이번 복원으로 산책 코스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 사라지는 것들

오후 3시 공구 음향 조명 업체가 밀집된 청계 2가에서 4가까지 산책로에는 행인들이 드물다. 그 대신 이곳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이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주차난으로 영업만 어려워졌다. 권리금 없이 점포를 내놔도 팔리지 않는다.”(광명공구 윤광현 씨·59)

오후 4시 반 버들다리와 나래교를 지나 평화시장에 이르자 의류나 중고서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반. 다산교를 지나 청계8가로 들어섰다.

‘없는 게 없다’는 황학동 도깨비시장과 한때 1000명에 가까운 노점상이 생계를 꾸려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노점상이 인근 옛 동대문축구장으로 가 활기가 줄었다. 비디오 가게들도 성인용품점을 겸한 곳으로 바뀐 곳이 많았다.

○ 청계천의 저녁

오후 6시 반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 남겨둔 청계고가의 두 교각을 지나 무학교에 접어들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왕십리 용두동 마장동 등 인근 주민들이 저녁 시간에 운동이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상업공간에서 휴식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청계천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벽산청계아파트 배옥선(55·성동구 하왕십리동) 씨는 “집값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지만 라이프스타일은 바뀌었다”며 “평일 저녁에는 젖먹이 손자와 산책을 하고 주말에는 아들 부부와 운동이나 산책을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아직 개통이 되지 않아 쪽문으로 드나들며 청계천을 즐기고 있다.

김재천(52·성동구 마장동) 씨는 “왕십리에서 한양대 근처의 살곶이다리까지 5개월째 운동을 하고 있다”며 “본격 개통이 되면 이용자가 크게 늘 것”이라고 말했다.

○ 청계천의 꿈

오후 9시 반 해가 떨어진 청계천은 낮과 크게 달랐다.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은 가운데 동대문패션타운만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최송이(15·영파여고1) 양은 “동대문패션타운에서 아이쇼핑을 한 뒤 청계천을 구경하러 간다”고 말했다. 유영배(24·한양대 4) 씨는 “외국인 친구가 오면 청계천∼종로∼시청∼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소개하고 싶다”고 밝혔다.

오후 11시 동대문 주변의 차량이 멈춰선 듯 움직이지 않는다. 오전 4시까지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몰리는 의류 시장 때문이다.

다음 날 오전 3시 의류를 파는 지하상가에는 ‘아줌마 사장님’ 5, 6명이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도시락을 꺼내들고 있었다. 부침을 권한 뒤 한 번 먹으면 정이 없다며 손수 젓가락으로 입에 넣어준다.

오전 6시 반 넉넉한 인심을 보여 주던 옷가게 사장님은 “많이 파셨느냐” 는 말에 “이런 불경기는 십수 년 만에 처음이다. 아들과 딸이 대학에 다니는데 등록금 벌려면 멀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동대문종합시장 벽의 디지털시계가 오전 8시 반을 가리켰다. 출근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퇴근을 서두르는 이들이 함께 청계천을 바라본다.

이들은 청계천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변영욱 기자 cut@doan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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