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1년 신사유람단 귀국

  • 입력 2004년 10월 21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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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고종이 물었다. 그의 앞에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돌아보고 귀국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신사’들이 대령해 있었다.

홍영식(洪英植)이 입을 뗐다. “재력을 쌓은 일본은 추진하는 사업이 많습니다. 군력도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박정양(朴定陽)이 나섰다. “일본은 겉모습만 보면 부강한 듯합니다. 그러나 속을 자세히 살피면 서양과 통교한 이후 교묘한 것만 좇을 줄 알고 다른 나라들에 진 빚이 많습니다.”

이 두 갈래 대답 속에 19세기 말 조선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쇄국체제를 유지하며 중국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처럼 근대국가로 나아갈 것인가의 딜레마였다.

1881년 4월 고종이 시찰단을 일본에 보낸 것도 이 고민을 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왜놈의 나라’였던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을 거치면서 조선을 넘볼 정도로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시찰단의 임무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시찰단은 출국 때와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당시 개화에 반대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이 불붙던 터라 고종은 시찰단의 활동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시찰단의 정식 명칭도 없었다.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은 일본 관리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시찰단은 일본 정부 부처, 대학, 화약제작소, 주식거래소 등은 물론 목욕탕까지 샅샅이 훑어봤다. 개화상은 놀라웠다. 시찰단은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고 회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근대화의 길로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100여권의 보고서에 담았다.

다시 고종 앞. 고종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을 본받을 만하더냐.”

대다수 시찰단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의 근대화가 놀랍기는 했지만 조선이 일본처럼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경우 유교적 가치관과 생활풍습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등 시찰단 내 소수파는 일본처럼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에 성공하는 것만이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팽배했던 외세 배척의 분위기에 이들의 의견은 묻혀버렸다. 1905년 조선은 일본과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됐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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