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제 첫 모의재판… 실제 살인사건 모델로 진행

  • 입력 2004년 8월 26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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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위원회가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개최한 배심원 모의재판이 시작되기 전 배심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사법개혁위원회가 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개최한 배심원 모의재판이 시작되기 전 배심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배심원 여러분들은 본 재판에 있어 사실을 정당하게 판단할 것과 본 법정이 지정하는 법과 증거에 의해 진실한 평결을 내릴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까?”

26일 오전 국내 사법 사상 최초로 모의 배심재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민사466호 대법정. 20∼64세의 대학생 회사원 주부 등으로 구성된 12명의 ‘최초’ 배심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배심원석에서 선서를 했다.

배심원들이 유무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건은 조무혁(가명·28)씨의 강도살인사건. 범죄 사실부터 수사과정까지 실제 사건을 토대로 짠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해 어려움을 겪던 조씨는 5월 7일 오후 2시경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서 공중화장실로 들어가는 김미자(가명·45·여)씨를 뒤따라 들어가 돈을 요구하다 김씨가 반항하자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다.

배심제 재판은 현행 제도와 달리 검사와 변호사가 목격자들의 증언과 증거를 토대로 재판장이 아닌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은 현직 변호사 3명씩이 각각 맡았다.

검사는 배심원들을 향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며 “오직 하나님과 배심원 여러분들만이 피고인의 죄를 가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변호사도 “한 젊은이가 경찰과 검찰로부터 부당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 또 다른 비극”이라며 “죽은 사람을 불러서라도 피고인의 무죄를 밝히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배심 재판은 검사와 변호사가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며 신문하던 기존 재판과 달리 역동적이었다.

검사와 변호사는 증인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배심원들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이들은 상대편의 증인신문 과정에서도 수시로 일어나 “유도신문이다” “강압적으로 신문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법정 오른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도 이날 배심재판의 특징.

검사측은 “범행현장에서 조씨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는 김씨의 딸 경숙(가명·28)씨의 증언을 부각시키며 경숙씨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몽타주를 보여줬다.

배심원들은 재판 내내 긴장된 표정으로 검사와 변호사가 공방을 벌이는 과정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재판을 끝낸 배심원들은 평의실에서 3시간여에 걸친 평의 끝에 만장일치로 조씨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한편 이날 오후에 진행된 참심제 모의재판에서도 재판부는 “숨진 김씨의 딸이 수사관의 유도신문 때문에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며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배심원들의 평결과 참심 재판부의 판결은 첫번째 ‘국민의 사법 참여’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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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성기자 verso@donga.com

▼모의 배심원 체험기▼

대법원은 26일 배심 형사 공개 모의재판을 하기에 앞서 20일 비공개 모의재판 시연(試演)을 했다. 이날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한 시민이 참관기를 보내왔다.

이달 초 대법원에서 배심원 선정 통보를 받고 20일 서울중앙지법에 갔다.

12명의 배심원은 나이와 직업 등이 모두 다양했다.

담당 판사가 형사재판의 기본원칙을 알려줬다. “피고인은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된다. 검사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리가 시작됐다. 서울의 한 공원 화장실에서 일어난 강도살인 사건이었다. 검찰측 증인은 3명, 변호인측 증인은 2명.

검찰측 증인은 유일한 목격자인 피해자의 딸, 담당 형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음성분석전문가였다. 하지만 목격자의 기억이 완전하지 못했고 담당 형사는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변호인측 증인들의 주장도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이어 배심원 평의가 열렸다. 배심장(배심 사회자)이 “어느 정도 마음을 정했을 테니 자신의 입장이 유·무죄인지 밝히고 이유를 설명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처음부터 유·무죄의 입장을 밝히면 토론이 진행되기 어려우니 헷갈리는 사안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자”며 이견을 냈다.

배심원들은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30∼40분 정도 평의를 진행한 뒤 배심원 전원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라는 결론을 내렸다.

법정으로 자리를 옮겨 배심원 평결이 발표됐고 모의재판은 끝났다. 나중에 대법원 관계자로부터 “이 사건은 실제 사건을 각색한 것인데, 실제 사건은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판결이 났다”고 들었다. 하루의 시간을 투자했지만 민주시민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박현석·연세대 영문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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