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과외 노이로제

  • 입력 2004년 8월 20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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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시장규모가 13조원이 넘는다는 과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극단적 시각이 존재한다. 과외에 대한 맹신(盲信)이 그중 하나다. 과외를 하면 성적이 오르며, 반대로 과외를 안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확신이다.

이런 믿음은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을 초래하면서 우리 사회를 조각조각 분열시키고 있다. 가난한 집에선 ‘우리 아이가 과외할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중산층 가장들은 ‘고액과외를 하는 아이들 때문에 우리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자책한다. 고액과외도 액수가 천차만별이라고 하니까 돈 있는 가정들끼리도 경제력 격차에 따른 박탈감, 상실감이 존재할 것이다. ‘가진 게 돈밖에 없는’ 극소수를 빼놓고는 모두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맹신과 알레르기▼

이런 정서는 사실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럴 거라고 느끼거나 인식하고 있을 뿐 과학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다. 고액과외가 공부 못하는 학생을 단번에 공부 잘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는지, 상위권 학생들의 경쟁에서 과외가 얼마나 점수차를 벌리는지 입증하는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빈곤층 아이들이 명문대에 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명문대 입학이 돈 가진 순서대로 결정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자 악의적인 선동이다. 물론 경제력과 무관할 수 없겠지만 대학 입학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부유층이라고 할 수 없는 전문직 종사자의 자녀, 교직 종사자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률이 높다고 한다. 만약 돈 있는 순서대로 명문대에 들어간다면 벌써 오래전에 난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불행하게도 빈곤의 세습과 불평등의 문제로 비칠 수밖에 없다.

과외를 잡으려면 먼저 과외에 대한 맹신부터 거두어 내야 한다. 그 점에서 과외의 효과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밀한 조사를 제안하고 싶다. 인재 양성은 간 데 없고 ‘과외 막기’에 급급한 교육정책도 과학적 조사에 근거해야 할 때가 됐다.

두 번째 극단적 시각은 과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과외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최근 들어 과외만 없어지면 어떤 교육정책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상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정부가 공영방송을 동원해 직접 과외를 벌이는 희귀한 일이 현실화됐고, 교사들이 과외방송을 틀어주는 ‘채널 가이드’로 전락해도 아무 탈 없이 학교가 굴러간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는 교육당국이 과외를 줄인다는 이유로 성적표를 없앤 뒤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른 채 학교에 보내고 있다. 중고교의 학력 저하도 고착되고 있다. 서울 강북이든 강남이든 학교마다 몇 명씩 있었다던 ‘최우수 학생’은 이젠 천연기념물처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고만고만한 학생들이 벌이는 ‘도토리 경쟁’으로 바뀌었다.

일부 세력들이 이런 만연된 정서를 정치적 목표 달성에 활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외를 없애기 위해 서울대를 없애고 사립대까지 평준화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랜 과외의 폐해에 따른 국민의 피로감을 교묘히 이용해 입지를 넓히려는 속셈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중고교에서도 시험과 성적표가 사라지고 로또와 같은 추첨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힘들다고 교육 포기할 수야▼

한국은 교육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나라다. 그 과정에서 경쟁은 필연이었다. 과열 과외나 사회적 약자의 기회불평등 같은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교육만큼 계층이동의 통로 역할을 해내는 분야도 없다.

교육에 과도한 평등주의가 개입되면 교육은 희망이 될 수 없다. 교육에 대한 극단적인 인식은 국가 동력이었던 교육을 단념하고 하향평준화의 우매한 국가로 전락하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교육의 본질을 직시하고 꺼져가는 교육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 절실하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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