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역사]1905년 장 폴 사르트르 출생

  • 입력 2004년 6월 20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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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사르트르의 시대’(앙리 레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사르트르의 오페라’가 종장을 향해 치달을 무렵, 그가 저지른 ‘과오목록’이 작성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주의(主義)의 테러리즘’에 대한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이 ‘프랑스 사상계의 군주’는 퇴위(退位)를 준비해야 했으니.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메를로 퐁티보다도, 작가로서는 알베르 카뮈보다도, 역사를 내다보는 데 있어서는 레몽 아롱보다 못하다….”

장 폴 사르트르. 그는 이념적으로 ‘퐁티의 오른쪽, 카뮈의 왼쪽’을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1950년을 전후해 스탈린의 소비에트체제와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지들과 결별한다.

사르트르는 “(스탈린의 정치 탄압은) 진보를 위해 불가피한 폭력”이라고 옹호했고 무자비할 정도로 아롱과 카뮈를 공격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꼭두각시에 의한 북침설(北侵說)’을 내세우며 퐁티와 갈라선다.

그는 이내 “북한이 미국의 계략에 빠져 남한을 공격했다”고 말을 바꾸었으나 사르트르의 지지자들은 슬프게도(?) 아롱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인이었다. 나폴레옹에 열광했던 ‘혁명의 자식’들이었다. “아롱과 함께 옳기보다는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게 바람직하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20세기에 대한 성찰이었고, 21세기에 대한 질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실존주의 철학의 교범이라고 할 ‘존재와 무’가 출간됐다.

이 무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이 프랑스 지성계를 휩쓸고 있을 때에 그는 마르크스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냉전이 깊어가던 1952년, 그는 소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

알제리의 반식민지 전쟁과 1968년 학생운동, 그리고 베트남전쟁…. 어디서나 작은 체구에서 찢어지는 듯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동하는 지성’이라는 말은 그에게 헌사된다. “지식인의 침묵조차 행동이다!”

1980년 4월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세계는 한 철학자의 죽음도, 한 소설가의 죽음도, 한 극작가의 죽음도 아닌 한 지식인의 죽음, 차라리 ‘지식인의 죽음’을 송두리채 보았으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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