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50억' 승용차 남산을 달렸다

  • 입력 2003년 11월 21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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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서초동 지방법원 광장에서 열린 권노갑씨 현대비자금 200억원 사건 현장검증에서 대형승용차에 2억 14개. 3억 4개 (총40억)로 총18개의 돈 상자가 가득실려있다. 상자안에는 현금이 아닌 종이가 가득 차 있다. [연합]
21일 서울 서초동 지방법원 광장에서 열린 권노갑씨 현대비자금 200억원 사건 현장검증에서 대형승용차에 2억 14개. 3억 4개 (총40억)로 총18개의 돈 상자가 가득실려있다. 상자안에는 현금이 아닌 종이가 가득 차 있다. [연합]

현금 50억원을 승용차에 모두 실을수 있을까.

승용차가 그 무게를 견디고 무난히 달릴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로 나왔다.

현대 비자금 20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의 공판과 관련해 21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조타운 주변과 남산 일대에서 현금 전달경로를 재현하는 현장검증이 서울 지방법원 형사 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 심리로 실시됐다.

그 결과 500∼600kg 무게의 상자 18∼25개를 실은 다이너스티 승용차는 아무런 문제없이 도로 주행에 성공했다.

이로써 “다이너스티에 500∼600kg 무게의 현금을 싣고는 정상 주행을 할 수 없다”고 반박해온 권 전 고문측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번 현장검증은 검찰측 공소사실처럼 현금 40억~50억원씩을 승용차로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변호인측이 요청한 현장검증 제안을 재판부가 받아들여 실시된 것.

현대측은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현금 40억∼50억원을 다이너스티 승용차에 싣고 남산의 하얏트호텔 주변을 거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에 가서 김영완씨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권 전 고문이 현대에서 받은 비자금을 세탁 관리해 온 것으로 검찰이 지목한 인물.

검증은 현금무게 측정과 현금상자의 제작, 적재, 수송 등 4단계로 나눠 진행됐으며, 박진만 검사 등 대검에서 3명, 변호인측에서 3명이 참석했다.

지난번 신라호텔 현장검증 때 직접 현장에 나와 검찰측 주장을 반박했던 권 전 고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작▼

이날 오전 10시 서초동 법조타운내 조흥은행 지점 2층 회의실에서는 은행에서 현금 5억원을 제공받아 2억원과 3억원 상자의 무게를 쟀으며 2억원짜리 상자가 23.2kg, 3억원짜리 상자가 34.7kg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검찰은 이 수치에 따라 2억원짜리 상자에는 A4용지 한 묶음과 A3용지 9묶음, 3억원짜리 상자에는 A4용지 26묶음과 B5용지 3묶음을 넣어 실험했다.

현장 검증을 참관한 민주당 관계자는 "2억원용 상자 20개면 40억원인데, 이 돈이 승용차에 모두 실릴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검찰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2명이 이 무거운 상자들을 모두 옮겨 실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검찰은 동일한 무게로 검증하기 위해 모래를 담은 비닐봉지를 이용해 소수점 한자리까지 수치를 맞췄으며, 포장에 사용된 접착테이프의 무게까지 고려했다.

이날 작업에 동원된 법원 직원은 10여명으로 오전 11시부터 포장을 시작해 약 1시간 20분동안 2억원용 상자 30개와 3억원용 상자 15개의 제작을 마쳤다.

▼적재▼

오후 2시 30분부터 검찰과 변호인측 간에 시종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현장검증의 하이라이트는 수십개의 현금상자가 다이너스티 승용차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

매번 전달된 금액과 현금상자 숫자에 대해 검찰과 변호인측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자 당초 재판부는 2억원, 3억원 상자를 조합해 현금 40억원에서 50억원 사이에 나올 수 있는 24가지 방법을 모두 실험키로 했으나 검찰과 권 전 고문의 변호인이 합의해 11가지 방법만 실시했다.

현금상자 적재에 앞서 검찰은 서울지법 앞마당에 쌓인 상자가 의외로 많아보이자 "현금상자를 복사지로 채우다 보니 너비가 최대 5cm나 늘어났다. 이런 검증은 검찰에 상당히 불리한 요인"이라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변호인측 역시 '상자가 모두 적재될 것으로 보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중요한 것은 적재 여부가 아니라 50억원을 싣고 주행하면 안전문제가 생길 수 있고, 승용차로 현금을 옮겼다는 상황 설정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이내 현금 40억원의 적재가 시작됐고 상자가 하나씩 승용차에 실릴 때마다 양측은 시종 굳은 얼굴로 이를 지켜봤으며, 마침내 3억짜리 4개, 2억짜리 14개의 상자가 적재 완료되는 순간 검찰과 변호인의 표정이 엇갈렸다.

40억원의 현금상자는 트렁크에 2억원짜리 8개, 보조석에 2억원짜리 3개, 뒷좌석에 2억원짜리 3개, 3억원짜리 4개가 들어갔다.

이후 41억원에서 44억원까지 9차례 진행된 적재 실험에도 모두 성공하자 변호인은 추운 날씨 탓인지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나머지는 됐으니 마지막으로 2억원짜리 25개를 실어보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결국 재판부의 중재로 2억짜리 14개, 3억짜리 6개를 싣는 경우와 2억짜리 25개를 싣고 두가지를 모두 실험했으나, 역시 결론은 검찰쪽으로 유리하게 밝혀졌다.

▼수송▼

이어 진행된 차량 운행에서도 승용차에 실린 현금상자들은 룸미러, 사이드미러 등을 가리지 않고, 운전에도 별다른 불편 없이 시속 60Km로 달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검찰은 우선 40억을 싣고 법원을 출발해 법조타운 주변 3.6㎞를 달려 주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변호인측은 경사로를 달려봐야 한다고 제안했고, 결국 두번째로 예술의 전당 인근 도로 중 경사가 심한 '고바우길'을 경유하는 6㎞의 거리를 주행했지만 승용차는 아무런 문제없이 주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이 정도면 확인된 것이 아니냐"고 웅성거리자 변호인측은 "50억을 싣고 검찰에서 주장하는 범죄현장인 하얏트호텔까지 가야봐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진만 검사는 "불필요한 요구"라며 거절했고, 결국 황한식 부장판사가 "이렇게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변호인측에서 원하는 실험을 모두 해보도록 하자"고 양측을 중재했다.

결국 다시 남산을 향해 출발한 승용차는 남산 하얏트호텔 주차장까지 아무런 무리없이 달릴 수 있음을 다시한번 증명하고 이날 현장 검증을 마쳤다.

승용차는 최고 시속 60km, 평균 시속 40km로 달렸으며, 운전기사 역할을 했던 서울지법 총무과 직원 이현석씨는 “(주행에) 별 무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현장검증 결과…검찰·변호인측 반응▼

검찰은 “예상되던 결과다. 할 필요가 없는 현장검증이었다”며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다.

문형식 변호사는 "우리는 돈을 받지 않았는데 이 실험의 결과가 무슨 상관이냐"면서 "검사측이 주장하니까 가능한지 반증하기 위해서 신청했을 뿐"이라고 애써 실험의 의미를 깎아내렸다.

그는 또 "아무리 생각해도 200억이라는 돈을 승용차에 40~50억원씩 나눠 실어 옮기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관계자도 "현장검증이라는 것은 법관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라며 "이날 실험은 실을 수 있냐, 달릴 수 있냐를 증명하는 것보다 이런 작업이 생각대로 쉽게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권씨측은 "현장검증에서 사용된 다이너스티 리무진에 뒷좌석 냉장고가 없어 트렁크가 더 넓어졌다"면서 "이때문에 적어도 상자 3개는 더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현대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도 지난 98년까지 생산된 다이너스티 리무진 승용차에는 기본적으로 냉장고가 설치돼 있다고 확인해 줬다.

하지만 서울 지방법원 형사 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는 "거, 진작 승용차를 협조하라니까 안하고 이제와서…"라며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자리를 떠났다.

허희재 동아닷컴기자 selly@donga.com

최건일 동아닷컴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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