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원칙 벗어난 양보가 불씨 남겼다

  • 입력 2003년 5월 15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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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대란을 몰고 온 화물연대의 운송 거부가 풀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가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보인 사태가 끝났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화물연대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합의안은 또 다시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정부는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던 다짐을 이번에도 어겼다.

특히 경유세 인상분을 전액 보조금으로 지급키로 해 정부 스스로 세금체계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택시업계가 형평성 차원에서 액화석유가스(LPG)에 붙는 세금 인상분을 보전해 달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초과근무수당의 비과세 대상 근로자에 화물차 차주를 포함시키기로 한 것도 원칙을 깬 양보다. 이런 식으로 합의하려면 무엇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며 지금까지 버텼는지 모를 일이다. 오죽하면 정부 내에서도 일방적 양보를 한탄하는 말이 나올까.

이번 협상 결과는 두산중공업 분규 해결과 철도노조 파업 철회 과정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노조 요구를 수용한 것 못지않게 노동계의 기대치를 높일 것이다. 노동자 신분이 아닌 차주들의 집단행동에 정부가 굴복함으로써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조 설립도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미숙한 협상은 준비 부족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예고된 화물연대 운송거부의 파괴력을 오판해 수수방관했으며 실력행사로 들어간 뒤에는 허둥대기만 하다가 요구조건을 대부분 수락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부산 현장에 내려간 장관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해 정부의 무능을 그대로 내보였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참여정부 출범 후 연전연승한 노동계의 요구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산별교섭을 진행 중인 금속노조는 협상 결렬시 파업을 예고해 둔 상태다. 그들이 요구하는 근로조건 악화 없는 주5일 근무제 등의 수용하기 힘든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정부가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앞으로 비슷한 유형의 분규가 속출할 것이며 그 후유증은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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