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이사장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KBS 맡기나"

  • 입력 2003년 5월 15일 16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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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관 KBS 前 이사장
지명관 KBS 前 이사장
15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년의 KBS 이사장 임기를 마친 지명관(池明觀·79)이사장은 "정치권이 총선이나 대선용으로 방송을 장악하려는 단견(短見) 때문에 한국 방송이 진정한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KBS사장이나 방송위원회 위원장 등이 지금처럼 정치적 파당의 이해에 따라 선출된다면 한국 방송의 미래는 지극히 어둡다"고 말했다.

지이사장은 5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4일 경기 안양에 있는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에서 동아일보와 두차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정연주 KBS 신임 사장 선출 과정에서 청와대측이 개입했다고 발언한 1일 이후 말을 삼가왔으나 "나라와 방송의 앞날에 대한 충정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남기고 싶다"며 흉중에 담아두었던 말을 토해냈다.

- 1일 KBS 정연주 신임 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지난달 30일 정사장과 첫 이사회를 가졌다. 통상 본부장들이 배석하는데 정사장은 취임 이틀만에 임원들에게 모두 사표를 받고 혼자 들어왔다. 안건에 KBS 재정문제가 있었다. 지난해 KBS가 1000억원 이상 이윤이 남아 보너스를 200%씩 지급한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는 적자였다. 회사측은 '결손이 나야 정부에서 돈을 얻지 않느냐'고 했다. 문제는 이런 재정 상태에 대한 정사장의 인식이었다. 한겨레 출신인 정사장은 '재정상태가 한겨레보다 낫네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KBS와 한겨레의 재정을 비교하는가. 또 정사장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그램 개편을 전부 중단시켰고, 중요 프로그램은 그때 그때 지시하겠다'고 한 발언에 더 놀랐다. 정사장이 기존 전통을 계승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어나갈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걱정이 돼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 KBS이사회의 정치적 독립성은.

"KBS이사회란 묘한 위치다. 정부에서 KBS사장을 임명하니까 정부의 생각을 무시하기 어렵다. 사장 공모제로 40~60여명이 후보에 올랐지만 이사진이 후보의 면면을 알 수 없다. 추천제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고 결국 정부로부터 입김이 있었던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출하게 됐다."

-이사장 재직시 정권의 압력이 있었는가.

"박권상사장도 청와대 주변에서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있다. 박사장은 김대중 대통령을 독대해 '나하고 운명을 같이 하자'는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노대통령의 취임 이후 청와대쪽으로부터 '그만두라고 한다'는 의사가 간접 전달돼 왔다. 박사장은 이를 직접 확인한 뒤 임기 전에 물러났다. 그러나 이사회에서는 박사장이 22일까지 임기를 마치고, 새사장은 새 이사회에서 뽑는 것이 순리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뭐가 급했는지 박 사장을 무리하게 그만두게 해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 정사장의 인사에 항의 편지를 보냈는데.

"정 사장은 이틀만에 부사장과 본부장 7명을 교체하는 등 혁명같은 인사를 단행했다. 물러난 이들에게 현황보고나 업무인계도 받지 않고 사표를 받은 것은 KBS의 소중한 인적 자산을 스스로 내친 것이다. 한국 사회가 혁명을 해야하는 시기는 지났다. 노 정권에 대해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새 시대를 열어달라는 것이지, 정권이 바뀌면 제사람 넣고 다른 사람 배제하는 구태를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 KBS의 미래와 위상에 대한 고언을 해달라.

"서동구 사장이 낙마하고 난 뒤 더 이상 외부사람에 의한 KBS 개혁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방송 비전문가가 사장으로 들어와서 정치적으로 사람을 앉히고 뒤흔들고 하다보면 어물어물 3년이 다 간다. 이렇게 밖에서 사장을 데리고 오고, 임원들을 전부 내쫓는 방식이 '내부 투쟁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이래선 KBS가 불행해진다. 일본 NHK의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 회장은 9년째 직무를 수행하면서 공영 방송의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KBS도 내부를 안정을 시켜가면서 지속적인 경영합리화와 개혁을 이뤄낼 리더십이 필요하다."

- 한국의 언론 상황이 갈등과 대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모든 언론이 대립하는 것은 문제다. 경쟁은 좋은데 상대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는 해선 안된다. 언론이 서로 경쟁하면서 영향을 주고 어떻게 공존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은 세계 1, 2차 대전동안 치열하게 싸웠지만 유엔이나 유럽 통합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비전도 함께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싸우기만 할 뿐 새로운 비전을 세우지 못한 채 벽만 쌓아가고 있다."

- 현 정부의 개혁은 무엇이 문제인가.

"노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일본 잡지 '세계(世界)'와의 대담에서 나는 노대통령을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노대통령의 말 중에 '개혁은 계단을 올라가듯 가는 것이 아니라 물흐르듯 흘러가서 어느덧 개혁이 되야하는 것이다'는 말을 일본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취임이후 노대통령이 보여준 행보를 비춰보면 이 말대로 되지 않고 있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쓸데없이 파란을 일으키고 매사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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