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한국어표준발음사전 펴낸 이현복 서울대교수

  • 입력 2003년 1월 21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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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기기자
/강병기기자
《이현복(李炫馥) 교수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올 겨울 들어 눈이 가장 많이 내린 날,

서울 봉천동 산자락의 이 교수 집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오르는 차바퀴는

조금은 불안해 보였다.

“눈이 쌓여서 길이 많이 미끄러울 텐데….”

전화로 집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그의 목소리에서 받은 첫 느낌은

손님의 ‘안전’을 염려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훈훈함이었다.

그러나 문향(文香) 가득한 서재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인상은 차츰

전형적인 선비의 그것으로 바뀌어 가는 듯했다. 온화해 보이는 용모 속에 숨은

단아함과 꼿꼿함.

‘25년 열정과 집념’의 원천이 전해져 왔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66).

그는 작년 말 우리말 역사에 새로운 장을 하나 더했다.

우리말 발음을 정리한 ‘한국어 표준발음사전’을

처음으로 펴낸 것이다.

국어 낱말의 발음과 강세 장단을

발음기호로 표기한 이 사전은

이 교수의 25년에 걸친 학자적 집념의 작품이었다. 》

●‘25년 산고’의 옥동자

그동안 국어사전에는 뜻만 나와 있을 뿐 발음 표시가 없었다. 외국어 사전에는 발음과 강세가 함께 표시돼 있다.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국어사전을 봐서는 한국어 발음을 알 수 없었다. 이 교수의 발음사전은 국어사전의 그 같은 ‘결함’을 메운 것이다. 사전에는 인명 지명 학술용어 전문용어 등 6만 단어의 발음과 강세가 일일이 국제 발음기호로 표기돼 있다.

―25년간 매달린 책이 마침내 나오고 나니 오히려 허탈감이라도 드셨을 법한데요.

“글쎄요, 뭐랄까 옥동자를 낳은 기분입니다.”

이 교수는 그 한마디로 그 오랜 산고를 압축했다.

―사실 저도 국어사전을 보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만 막상 사전을 보고서야 ‘이런 책이 필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부끄러운 일이죠. 우수한 말을 갖고도 그동안 이런 기본적인 사전 하나 갖추지 못했으니….”

25년 ‘장정’은 이 교수가 60년대 말 영국 런던대 음성학과에 유학하던 때 싹텄다.

“서울대 언어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일을 하다 런던대 음성학과에 유학 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정확한 발음을 표기한 사전을 다 갖고 있는데 우리만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때 발음사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가 70년대 일본 도쿄대 교환교수 시절 일본어 발음사전을 보고 다시 확인했어요. ‘아, 동서양 모든 국가가 말씨의 표준어화를 위해 발음사전을 냈는데 우리나라만 뒤져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때부터 이 교수는 본격적으로 국어 낱말의 발음과 강세 장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사전 저술 작업에 들어간 건 76년. 그러나 이 일이 25년이나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해보니 정말 힘든 작업이더군요. 무엇보다 재미가 없는 일이었어요. 일의 성격도 혼자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요.”

제자들이 많이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도움을 받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자료수집 단계에서는 남이 도와줄 수 있었으나 그 외의 작업은 전부 혼자서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적잖은 사재도 들였다. 연구비 지원을 받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연구비를 지급하는 기준은 보통 1, 2년. 언제 끝날지 모를 일에 연구비를 대주는 데는 없었다.

교수로서의 일상적인 일에다가 학회 일 등으로 외국 갈 일이 있으면 작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됐다.

―25년간 가장 힘든 고비는 무엇이었습니까.

“한 10년 전부터는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완성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결국 작년 2월 퇴임하고 나서야 이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고, 기나긴 여정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그렇게 막바지에 서두르다가 눈에 무리가 갔는지 망막이 터지기도 했다.

어릴 때 노래를 잘 불렀던 이 교수는 성악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부모님 반대로 진로를 바꿨지만 그에게 이번 사전은 어쩌면 그 꿈의 한 자락을 이룬 것인지도 모른다.

“성악가는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데 지금까지 우리말은 가사만 있고 악보는 없는 식이었어요. 이 사전은 그런 점에서 우리말 표준발음의 종합적인 악보인 셈입니다.”

●언어의 동-서, 남-북 통일 시급

이 교수의 발음사전 저술 작업은 그가 언어학자로서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의 한 벽돌을 쌓은 일이랄 수 있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언어의 ‘통일’이다.

“우리말이 갈래갈래로 분열되고 있어요. 남과 북으로 이질화되는가 하면 해외 동포들간에도 차이가 벌어지고 있어요. 이걸 다시 잡으려면 뭔가 통일의 기준이 있어야죠. 지금까지 나온 사전으로는 그게 안되겠기에 발음사전을 내놓은 겁니다.”

사투리에 대한 강한 소신도 그렇다. 지역감정의 뿌리에는 사투리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지역 통일의 전제가 표준발음이라고 얘기한다.

“사투리가 같은 지역 출신 사람들의 배타적 결속 의식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는 얘기를 옛날부터 주장해 왔습니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사투리를 아예 없애자는 건 아닙니다. 맛깔스러운 사투리는 살려야겠지만 사적인 생활과 공적인 언어생활은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공적인 언어생활을 주도하는 공직자나 지식인들은 사투리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과거 박정희 정권 때부터 그 같은 주장을 폈지만 학자로서의 그런 소신은 예기치 않게 현실의 두꺼운 벽과 편견에 부닥쳤다.

“70년대 말 방송사와 우리말에 관한 특집을 같이 준비했는데 사투리 문제를 제기한 것 때문에 방송이 막힌 일이 있어요.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최근 인터넷에서는 그의 사전에 관한 화제가 ‘사투리’ 주장에 관한 거센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사투리’ 주장이 남한 내부의 언어 통일에 관한 것이라면 북한 교수와의 공동연구는 남북간 언어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작업이다.

이 교수는 90년대 초반 폴란드 바르샤바대에 초청교수로 가 있을 때 역시 그 대학에 와 있던 북한의 조선어과 교수를 만난 게 계기가 돼 10년 이상 남북 언어 이질화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다.

“한국어는 서양어와 구조가 달라 힘든데 남북한 교수가 가르치는 말이 다르니 폴란드 학생들이 더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북한의 교수에게 그랬죠. ‘각자 자기 강의만 할 게 아니라 우리끼리 언어를 통일시켜 보자’고.”

그렇게 해서 남북한 언어 표준화연구회를 만들었고 10년 공동작업의 결실은 곧 공동연구서로 발간될 예정이다.

―이제 필생의 작업도 끝냈고 지금까지 벌여온 일을 정리할 일만 남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할 일이 많아요. 발음사전이 나오긴 했지만 너무 무겁고 두꺼워요.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도록 일상생활에 필요한 빈도수가 많은 어휘만 골라서 소발음사전을 만들려고 합니다. 또….”

‘또’, ‘또’가 연방 이어진다. 컴퓨터가 막 나오자마자 배운 디지털 선구자답게 발음사전 CD도 만들 계획이다. 또 인터넷으로 한국어 표준발음 강좌도 열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 교수의 집을 나서는데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李교수 ‘한글 국제화’ 실험▼

이현복 교수는 태국 고산지대 한 부족 사람들에게 ‘고마운 선생님’으로 통한다.

이현복 교수는 95년부터 1년에 두세 번씩 태국과 미얀마 접경지의 고산지대에 들어간다. 그가 찾는 곳은 화전생활을 하고 있는 라후(Lahu)족.

말은 있지만 고유 문자가 없는 이 부족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그가 이 부족의 문자수단으로 가르치는 글자는 바로 우리 고유의 한글이다.

이 교수가 원주민에게 가르치는 한글은 한글 자모체계를 바탕으로 전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국제한글음성문자(International Korean Phonetic Alphabet)’를 응용한 것이다. 자모음을 합쳐 40개. 우리 한글 자모 24개보다 더 많은 ‘확장판 한글’이다.

오랜 세월 자신들의 의사를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라후족 사람들은 이제 한글을 써서 간단한 인사말과 안부를 전할 정도로 한글에 익숙해졌다. 그동안 서구 선교사들이 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다가 실패한 것을 감안하면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한 것이다.

“한글이 세계의 어떤 언어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익히고 사용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이 교수가 라후족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부족의 의상이나 놀이 등이 우리와 흡사한 걸 발견했기 때문. 이 교수는 이들을 ‘고구려 유민’쯤으로 추정하고 한글 전파에 들어갔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문자가 없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서’라고 했듯이 한글을 수출해 다른 민족에 보급하면 세종대왕 뜻과도 맞는 것 아닙니까.”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정신이 이 교수를 통해 ‘국제화’되고 있는 셈이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약력▼

△1936년 충남 서산 출생 △1959년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1970년 런던대 언어학 박사

△1970∼2002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현 명예교수) △1976년 대한음성학회 창립(현 명예회장) △1991년∼현재 한글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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