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재평가 의미

  • 입력 2002년 11월 20일 18시 23분


정부가 20일 제주 4·3사건 당시 사망하거나 부상한 제주지역 주민 1715명을 희생자로 공식 결정한 것은 이 사건의 성격규정 및 사건 관련자들의 명예회복 등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미〓제주 4·3사건은 1948년 사건 발생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공식적인 논의조차 금기시 될 정도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돼 왔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의 성격 규정이나 인명피해 집계 등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합의된 의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정부의 결정은 이 사건을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폭동’이라고 보는 기존의 공식 시각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제주 4·3사건 이후 반세기 이상 한(恨)을 품고 살아온 제주도민과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물꼬’를 튼 것으로 볼 수 있다.

▽경과〓정부의 이번 결정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주 4·3사건은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 사회가 민주화 길로 접어들면서 사회단체 학계 등을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제주 4·3사건에 대한 논쟁이 가열됐다.

그 전까지 군사정권은 제주 4·3사건을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해 이와 다른 논의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이에 대해 재야사회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추며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성격 규정을 제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됐고2000년 1월 여야의원 공동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됐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됐고 제주도에 ‘실무위원회’가 출범해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작업이 이뤄졌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신고는 2000년 6월부터 1년간 진행돼 사망 1만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장애 142명 등 모두 1만4028명이 접수됐으며 이 중 1만3856명에 대한 사실조사가 이뤄졌다.

정부는 이번 조사와 심사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이거나 ‘군경 진압에 직접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 희생자 결정에서 사건에 연루되거나 6·25전쟁 당시 예비검속 등으로 옥고를 치른 수형인(受刑人)에 대한 희생자 결정을 유보해 4·3유족회 등 관련 단체의 반발을 사는 등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이들 희생자는 광주민주항쟁과 달리 개별적인 보상이 없으며 제주시 봉개동에 조성 예정인 ‘4·3 평화공원’에 안치될 수 있다.

▽제주 4·3사건〓제주4·3사건 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당시 무장대의 단독정부 수립, 군경토벌대의 강경 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군경토벌대와 무장대의 충돌 과정에서 주민집단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제주〓임재영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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