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현주소⑤]“선행학습, 명문대 합격 열쇠아니다”

  • 입력 2002년 5월 13일 18시 02분


《헌법재판소가 과외금지 조치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린 지 만 2년이 지났지만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사교육 문제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학교진도를 1,2학년까지 앞당겨 배우는 선행학습이 유행하면서 학교 교육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선 학교 교장, 학부모, 학원 관계자 등을 초청해 ‘사교육 현주소’를 진단하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사회〓사교육 문제, 특히 선행학습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요즘 실상이 어떻습니까.

▽박계선 위원〓고3, 중3 아이 둘을 두고 있는데 저도 어쩔 수없이 과외를 시키고 있습니다. 선행학습반이나 경시대회반에 들어가면 명문대 합격 열쇠라도 쥔 것처럼 자랑하는 학부모들과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겠다’는 학원들의 유혹이 많아요. 아침마다 신문에 끼어들어오는 학원광고를 1시간 정도 꼼꼼히 살피는 습관까지 생길 정도죠. 중학생에게 고교 수학을 가르친다며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학원 광고가 홍수를 이룹니다.

▼전교생 70%가 학원다녀▼

▽이수일 교장〓전교생 중 70%는 개인과외나 학원에 다닙니다. 아이들이 학원공부에 쫓기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느 학원이 족집게라더라’ ‘어느 학원의 누가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등의 입소문을 통해 학부모는 ‘학원에 가야 대학에 간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제가 1년반 전 부임해 학생의 감성과 직관력, 창의력을 위해 “모의고사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더니 학부모들이 “이제 우리 학교는 다 버렸다”며 난리더군요. 학교를 입시학원 쯤으로 알고 대학 진학률이 높거나 보충수업과 모의고사를 보는 학교를 좋아하는 학부모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아요.

▽강태중 교수〓학원 공부에 의존하는 것은 일종의 ‘중독’입니다. 일단 학원에 의존하면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 상실돼 혼자서는 공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학원을 찾는 ‘학원중독’ 현상이 나타납니다. 도서관 등에서 책과 씨름하며 스스로 탐구하는 아이들이 적은 것도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진호 원장〓그러나 학원이 사교육 문제의 원흉인 것처럼 오해를 받아 착잡합니다. 내 자녀가 성적이 뒤져 전문대에도 못갈 정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많은 학생들을 상대하는 학교 교사에게 내 아이만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어요. 이런 점을 학원이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데, 사교육 문제를 학원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사회〓선행학습이 효과는 있는 것입니까.

▽박 위원〓저도 성적이 좋은 둘째 아이에게 기대를 갖고 선행학습도 시키고 경시대회반에도 등록해 봤어요.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다녔어요. 몇달 뒤에는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하더니 “매일 새벽 1∼2시까지 공부하고 체벌까지 하는 학원 공부가 싫다”고 불만을 털어놨어요. 학원에서는 “이번 고비를 잘 넘겨야 된다”고 붙잡았지만 결국 아이도 저도 포기했죠. 아이의 능력을 감안해 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제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지요.

▽김 원장〓서울 강남의 일부 학원이 초등학생에게 고교 수학을 가르치는 등 물의를 빚고 있지만 실제로 보습학원의 80% 정도는 한 단원 정도 앞서 가르치는 정도예요. 학원도 영업을 고려해야 하는데 학부모의 선행학습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요. 우수한 학생이 모이는 선행학습반이나 경시대회반을 운영하지 않으면 수강생이 오지를 않습니다. 얼마전 선행학습반에 들어간 한 학생의 실력이 자꾸 떨어져 부모에게 수준을 낮춰 보라고 했더니 곧바로 다른 학원으로 옮기더군요.

▽박 위원〓선행학습반이나 특목고 대비반의 경우 20여명 중 1,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들러리입니다. 그래도 학부모들은 일반 학원비보다 두배나 더 내면서도 이런 반에서 공부시킨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요. 얼마전 한 모임에 갔더니 초등학생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말을 잘 들을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시켜야 한다”고 하더군요. 반면 고교생 학부모들은 “초등학교 때 선행학습 시켜봤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반박해 어리둥절했어요. 학원에 많이 다니면 ‘학원발’로 성적이 조금 오르지만 수강을 끊으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부모 강요 때문에 선행학습과 경시대회 준비에 내몰리다가 가출하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아이들도 봤어요. ‘경시대회 선수’라는 아들을 둔 중학생 학부모는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키도 자라지 않는다”고 걱정하더군요. 아이에게 어른 옷을 입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선행학습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강 교수〓선행학습을 하는 학생은 소수지만 모든 관심이 집중돼 교육적 파장이 큽니다. 선행학습에 매달리는 것은 대입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자녀를 먼저 출발시켰다는 데서 학부모들이 심리적 위안감을 찾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단기적 효과만 보고 선행학습을 하다 보면 오히려 학교 수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회〓사교육 열풍 때문에 ‘학교 붕괴’ ‘교실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박 위원〓얼마전 강남의 한 고교 수업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깨어있는 아이들은 앞줄 몇 명과 교실 뒤에서 벌을 받고 있는 아이들 뿐이었어요. 아이들이 학원에서 밤늦게 공부하느라 학교에서는 잠만 잔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잃어▼

▽이 교장〓요즘은 ‘학원문화’가 학교를 지배합니다. 한 학부모는 아이가 시험기간만 되면 인근 학교 기출문제를 풀어주는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 난감하다고 하소연을 해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쉽게 성적을 올릴 수 있는 학원에 무조건 의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학원 분위기에 익숙해져 교사에게도 이런 대가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소수 위주의 학원 수업에 익숙한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악화(학원)가 양화(학교)를 구축하는 셈이지요.

▽사회〓학교가 학습부진아나 영재성 있는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학교도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위원〓우리 집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과학시험은 주변 학원들의 기출문제 풀이가 통하지 않기로 유명해요. 지문이 길고 원리를 묻는 문제가 출제되거든요. 그랬더니 학생들이 학원보다 학교수업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더군요. 며칠 전 어버이날 아들이 카네이션과 함께 성적표를 내밀며 “시험성적이 나빠 죄송하다”며 용서를 구하더라고요. 학원에서 만든 기출 문제 500∼600개를 며칠 밤을 새며 공부했는데 정작 학교시험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적이 나빠 속상했지만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조금 위안이 됐습니다.

▽이 교장〓인재관도 달라져야 합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지능지수(IQ)가 좋은 학생도 인재이지만 창의력이 있고 인성이 좋은 학생도 우수한 인재입니다. 서울의 한 과학고에서 영재반 학생을 선발하면서 학년을 뛰어넘는 문제보다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을 요구하는 문제를 냈더니 선행학습이나 경시대회 과외를 한 학생보다 스스로 탐구하는 공부를 한 학생들이 더 많이 뽑혔다고 합니다. 대입 등에서 평가방법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평가방법이 바뀌면 교사들도 학생 중심의 교육활동을 강조하게 됩니다. 우리 대학들도 미국처럼 성적 뿐 아니라 다양한 잣대로 학생들을 뽑는다면 과도한 학력경쟁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고교 내신성적을 디스켓에 담아 대학에 ‘진상’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대학 점수위주 선발 바꿔야▼

▽강 교수〓대학을 안 나오면 사람 대접을 안하는 풍토도 변해야 합니다. 시험 당일 컨디션 등에 따라 시험점수가 5∼10점 달라질 수도 있어요. 교육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데 당락을 좌우하는 잣대로 쓰이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무의미한 평가보다 면접이나 교사 추천서 등 주관적인 평가를 확대해야 합니다. 입시제도가 달라지려면 상위권 학생의 숫자로 대학을 평가하는 인식도 변해야 합니다. 미국처럼 대학 구성원의 민주성과 다양성을 고려해 다양한 학생들을 뽑아야 합니다. 미국 명문대에서는 학교 성적이 중간인 학생들도 많이 뽑지 않습니까.

▽사회〓그렇다고 사교육을 도외시할 수도 없는데 개선책은 있을까요.

▽김 원장〓쉽지 않은 문제지요. 어느정도 학교가 신경을 쓸 수 없는 부분을 학원이 보완해주고 있습니다. 경시대회 등을 내세워 ‘학원에 다녀야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식의 과장 광고를 하거나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등의 바람직하지 못한 학원 운영 관행은 근절돼야 합니다. 그래서 학원계에서는 이런잘못된 영업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자율정화 활동을 강화하고 있어요. 얼마전에도 강남에서 오후 10시 이후 영업을 하는 학원을 단속을 벌여 14개 학원을 찾아냈습니다.

▽강 교수〓사교육 열풍은 교육현실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시작됩니다. 선행학습의 효과 등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하나 변변히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학생들의 성장 과정 등을 종단적으로 추적 조사해 사교육의 효과 등을 검증하고 대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박 위원〓학원도 영업만 따지지 말고 아이의 실력에 맞는 수업을 학부모들에게 권했으면 좋겠어요.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각종 경시대회와 학원의 특목고 입시설명회는 자제돼야 합니다. 특히 학원 입시설명회에 특목고 교장이 참석하는 현실을 보면서 학부모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교장〓무엇보다 학교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공교육이 산다고 봅니다. 학력만을 중시하는 사회 관행도 고쳐져야 합니다. 아울러 각 가정에서도 학생들이 전인적인 성품을 갖추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자녀를 교육했으면 합니다.

정리〓박용기자 parky@donga.com

▼참석자▼

강태중 (중앙대 교수·교육학)

이수일 (서울 오금고 교장)

박계선(서울 구룡중 학교운영위 원회 위원·학부모)

김진호 (전국보습교육협의회 부회장)

이인철 (사회1부 교육팀장·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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