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의 현주소③]학부모 울리는 학원 상혼

  • 입력 2002년 4월 29일 17시 26분


《중학교 2학년생 딸을 둔 주부 박모씨(42·서울 강남구 개포동)는 얼마전 집 근처의 한 보습학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학원 관계자는 딸의 학년과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취약한 과목이 무엇인지까지 소상히 설명한 뒤 자기 학원에 다녀 보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외국어고 입시 준비를 하려면 3학년 과정을 미리 배워야 한다고 유혹하는데 솔직히 마음이 솔깃했다”며 “그러나 한달 수강료가 60만원이나 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 진도를 앞질러 배우는 선행학습이 유행처럼 번지는 뒷 배경에는 이처럼 학부모들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는 학원들의 교묘한 마케팅 전략이 깔려 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학원들의 생존 전략이 무분별한 선행 학습을 부추기고 불안한 학부모들이 더 선행학습에 매달리는 악순환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학원들은 수강생을 유치하기 위해 선행학습을 경시대회나 영재교육 등 교육제도가 달라지면 “이렇게 해야 대학에 간다”는 식으로 과대포장해 학부모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관련기사▼

- 학원 교묘한 학생유치 '마케팅'
- 선행학습 효과 2~3% 불과

서울 강남구 대치동 C학원은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수학 경시대회반을 만들어 고교생들도 어려워하는 수학 교재인 ‘실력 정석’을 가르치고 있다.

이 학원은 초등학교 영재반도 개설했지만 실제 수업 내용은 경시대회 기출문제를 풀거나중학교 수학문제를 가르치는 수준이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 G학원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영재학급과 영재학교 진학반을 개설해 놓고 경시대회 대비 교재 등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재반 수업을 받으면 경시대회 문제는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도 끄떡없이 해결할 수 있다’며 광고 전단지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적중문제까지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 최진복(崔鎭福) 장학사는 “영재반 모집때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유리하지 않도록 창의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출제했더니 쩔쩔매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중학생의 경우 학원에서 과학고나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입시를 위해 각종 경시대회를 준비해야 한다며 선행학습을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2000년 한해동안 수학 과학 논술 한자 예체능 등 20여개 분야에서 911개의 경시대회가 열렸고 이 중 학원 출판사 등 사설기관이 개최한 대회도 637회나 됐다.

경시대회에 입상한 경력이 있으면 특목고 진학에 유리하고 특목고에 불합격하더라도 경시대회 준비 과정에서 고교 과정을 미리 공부하기 때문에 고교 진학 뒤에도 손해를 볼 것이 없다고 선전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M학원은 최근 중학생 대상으로 고교 수학반을 개설하면서 학생들을 쉽게 끌어오기 위해 고교 수학을 잘 가르친다는 D학원의 이름을 빌려 간판을 바꿔 달았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학원들이 개업과 폐업을 반복하면서 교육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강남지역의 경우 정확한 학원수 조차 파악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무분별한 학원 선행학습은 학교 수업과 교사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서울S중 수학 교사인 김모씨(여)는 “학원에서 잘못된 개념을 배워오는 학생도 있는데 아무리 바로잡아주려 해도 교사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한숨을 지었다.

김교사는 “그래서 단원을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이번 단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합시다’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학원의 선행학습 수업은 동일한 내용을 여러번 배우는 반복학습 형태이며 문제풀이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되레 기본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서울K고 1학년 임모군은 “학원에서는 원리에 대한 기본 설명은 1분도 채 안되고 문제를 풀면서 그때 그때 대충 설명하고 넘어간다”고 말했다.

선행학습은 또 학생의 자율적인 학습 습관을 해치기도 한다. 서울Y고 1학년 김모군의 학부모는 “아이가 학원에서 하라는 대로만 공부하다보니 혼자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고 말했다.

학원이 학부모들을 현혹하는 수단은 광고 뿐만이 아니다. 학부모 대상으로 입시설명회를 개최하거나 ‘마당발’ 학부모를 상담실장으로 영입해 학생들을 끌어오는 1 대 1 마켓팅까지 다양하다.

상위권 학생이 많이 모이는 학원은 선행학습 수준도 높고 학부모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학원간에 ‘경시대회 선수’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A학원은 최근 강남 지역 고교의 상위권 학생 학부모를 많이 알고 있는 학부모 상담실장을 영입하면서 수강생 수가 두배로 늘었다.

학부모 상담실장은 기본급 100만∼200만원에다 유치하는 학생 수강료의 10∼20%를 별도 성과급으로 받기 때문에 월 수입이 600만원 이상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최근 문을 연 서울 강남구 대치동 M학원은 학부모 상담실장을 동원해 무리한 마케팅을 펼치다 주변 학원 업자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학부모 상담실장이나 학부모가 학원에 학생 1명을 끌어올 때마다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다른 학원생을 빼오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한 학부모 상담실장은 “전교 1등, 경시대회 금상 수상자 등 학부모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상위권 학생을 장학금 혜택이나 학원비 면제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워 유치한 뒤 다른 학부모들에게 ‘우리 학원에는 누구 누구가 다딘다’는 식으로 홍보하면 넘어가지 않는 학부모들이 없다”고 자랑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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