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뒤엔 테이프 있다

  • 입력 2002년 4월 22일 18시 25분


권력형 비리 의혹사건을 일컫는 이른바 ‘게이트’에는 거의 예외 없이 녹음테이프나 녹취록이 등장하고 있다.

녹음테이프나 녹취록은 내용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일단 그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 이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켜 사건의 파장을 일파만파로 확대한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3남 홍걸(弘傑)씨 비리 의혹에 관련된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崔圭善)씨의 이름을 딴 ‘최규선 게이트’에도 어김없이 녹음테이프가 등장하고 있다.

최씨는 그동안 정관계 인사들과의 주요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해왔으며 그의 비서였던 천호영(千浩榮)씨가 공개한 녹취록은 최씨가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거기서 나온 돈의 일부가 홍걸씨에게 전달됐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97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연루된 사건은 녹음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까지 공개된 그야말로 ‘녹취록 게이트’의 결정판이었다. 현철씨는 97년 3월 YTN 사장 선임과 관련해 당시 이원종(李源宗)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 나눈 전화통화 녹음테이프가 공개돼 물의를 빚었다.

당시 녹음테이프를 공개한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朴慶植)씨는 이후 당시 전화통화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공개해 결국 현철씨가 구속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92년 12월 대선 직전에는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집에서 당시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관권 개입과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 등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2000년 9월에는 신용보증기금 대출 보증 건과 관련해 당시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장관 등의 압력 의혹을 제기한 이운영(李運永) 전 신보기금 영동지점장이 자신의 비리 혐의가 경찰 사직동팀과 검찰의 의해 조작됐음을 주장하는 녹취록을 공개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코스닥 등록 예정기업의 유상증자 과정에서 조직폭력배가 개입해 주식을 갈취했다고 고소한 박모씨와 사건 수사를 지휘한 서울지검 동부지청 김모 부장검사의 대화를 담은 녹취록이 공개돼 물의가 빚어지기도 했다.

녹음테이프나 녹취록은 미국에서도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백악관 내에 자신이 설치해 놓은 자동녹음시스템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주요 인사들과 대화하는 내용이 모두 자동 녹음된다는 사실이 공개됐고 녹음테이프의 법정 제출을 거부하던 닉슨은 결국 중요 부분을 삭제하고 제출했다가 결국 탄핵 위기에 몰리자 사임했다.

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파동 때에는 ‘부적절한 관계’의 당사자였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의 관계를 드러낸 20시간 분량의 녹음테이프 때문에 클린턴의 성추문이 입증되기도 했다.

한양대 심리학과 한태선(韓太善) 교수는 “녹취는 믿음이 없어진 권력사회에서 자기보존과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협박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더러운 속임수”라고 말했다.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는 “자격이 부족한 사람들이 고위 공직에 오르다 보니 녹취 녹음 등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권력형 비리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