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반년새 교실 5986개 지으라" 고교 학급증설 밀어붙이기

  • 입력 2001년 9월 2일 18시 47분


《서울 강동구 B고교는 요즘 300평 규모의 녹지 공간에 심어놓은 나무를 베어내는 문제로 시끄럽다. 교육인적자원부가 교육여건 개선을 위해 갑자기 발표한 학급당 학생수 줄이기 계획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이 일방적으로 6개월 내에 15개 교실을 더 지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2, 3년 후에는 학생수가 줄게 되므로 있는 건물도 헐어내야 할 판인데 녹지 공간을 밀어내고 건물을 지으라니요. 더구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두달 남겨두고 공사를 시작하라니 수험생들의 반발은 어떻게 합니까.”

강동구의 D고교는 12개 교실을 증축하라는 ‘명령’을 받고 궁리 끝에 테니스장에 건물을 짓기로 했다. “장소가 없어 못 짓겠다고 했더니 옥상에 가건물을 세우라고 하더군요. 차마 학생들에게 가건물에서 공부하라고는 못하겠고….”

새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국의 고교들이 학급 증설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교육부가 7월 20일 대통령의 공약사항이라며 당초 계획보다 2년 앞당긴 내년 2월까지 고교 학급당 학생수를 42.7명에서 35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이후 일선 고교는 “무리한 증축 계획으로 날림 공사에 애써 확보한 예산만 날릴 판”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무리한 교실 증축 계획〓교육부는 당초 5220개의 교실을 증설할 계획이었으나 실태 파악을 거쳐 지난달 14일 5986개 교실 증설로 목표를 올려 조정했다. 서울의 경우 188개 인문고교의 67%인 126개 고교에서 모두 1315개의 교실을 새로 지어야 한다. 전국 1957개 인문계 상업계고 중 47%인 933개교에서 증축 공사가 벌어질 예정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촉박한 공사 일정. 건축물 구조 안전 진단-현장조사 및 설계-설계용역 발주-기본 및 실시설계-공사계약-착공-준공-사용승인 검사 등 복잡한 공사 일정을 6개월 만에 끝내야 한다.

서울 강남의 K고교 교장은 “학교 건물의 특성을 고려해 새 건물을 지으려면 설계에만 2, 3개월이 걸린다”며 “현재 공기로는 날림공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도 “6개월만에 교실을 증축한다는 것은 무리”라며 “특히 수능시험 준비가 한창일 때 공사에 들어가게 돼 수험생들의 반발로 공사가 늦어질까 조마조마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겨울 공사의 경우 비싼 건식 공법을 쓰게 돼 예산이 당초 계획보다 교실당 1500만원, 전체적으로는 897억9000만원이 더 들 전망이지만 추가예산 확보는 불투명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일부 고교는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다.

▽일선 고교 반발〓일선 고교들은 일방적으로 증축 계획을 세워 시달하는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반발하고 있다.

서울의 20여 사립고를 포함해 일부 사립고는 증축 공간이 없고 날림 공사로 안전 사고가 우려된다며 증축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현재 3개 학년 43개 학급에서 58개 학급으로 늘게되는 서울 강동구 D고교측은 “학급수가 늘어남에 따라 교사수도 30명 이상 증원되지만 교무실과 사무용품 화장실 등의 부대시설 지원 계획은 전무하다”며 답답해했다.

51학급에서 63학급으로 늘어나는 서울 노원구 S고교측은 “학생들 이름은커녕 100명이 넘는 교직원들 이름도 제대로 외우기 힘들 정도로 학교가 비대해 질 것”이라며 “51학급도 모자라 손바닥만한 운동장에까지 건물을 지어 학교를 키워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서울 종로구 J고교측은 “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기존 건물 옆에 볼품없는 철골조 건물을 날림으로 지으라니 기가 막힌다”며 “2, 3년 후에 학생수가 줄어들텐데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교원 단체 반대 움직임〓학급당 학생수 감축을 꾸준히 요구해 온 교원단체들도 ‘얼마나’줄이느냐에 못지않게 ‘어떻게’ 줄이냐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이경희(李京喜) 대변인은 “과밀(過密)학급 못지않게 과대(過大)학교도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라며 “무리한 교실 증축계획을 중단하고 체계적이고도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조흥순(曺興純) 정책연구부장은 “교실을 늘린다며 실험실 도서관 등을 없앤다면 교육 여건은 오히려 열악해진다”면서 “학급당 학생수 35명이라는 수치 달성에만 매달려 조급해 하지말고 장기적 안목으로 교육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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