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다 구경만"…갤러리 직장인 급증

  • 입력 2001년 3월 27일 18시 29분


서울 여의도의 한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김모씨(30)는 아직 3월도 다 가지 않았는데 벌써 올해 사용할 수 있는 7일의 휴가중 5일을 썼다. 월요일 휴가를 몇 번 내서 스키장과 단식원에 다녀왔고 설연휴 때도 2일 휴가를 더 붙여 썼다.

여름 휴가를 못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여름까지 계속 회사에 다닐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휴가를 빨리 써버리는 게 유리하다”고 태연히 말했다. “확실한 이직계획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이 나타나면 당연히 옮길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모은행 대리 장모씨(32)는 언제 퇴직하는 게 가장 유리한지를 놓고 동료들과 자주 ‘토론’을 벌인다. 월급을 탄 뒤 10일이 지나 퇴직하면 퇴직하는 달의 월급까지 챙길 수 있다는 정보도 여기서 들었다. 장씨는 “상반기 상여금을 받은 뒤 나가는 게 더 유리하냐, 하반기 상여금까지 챙기고 나가는 게 유리하냐도 주요 얘깃거리”라고 소개했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연봉제 도입과 구조조정, 그리고 벤처회사로의 이동 열풍 등을 겪은 뒤 이른바 ‘갤러리 직장인’들이 급증한 데 따른 새 풍속도다. 갤러리 직장인이란 골프대회의 갤러리(관람객)들처럼 회사 돌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는 주인의식 없는 직장인들을 일컫는 말. 이들의 머릿속에는 항상 ‘이직’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지만을 생각할 뿐 회사의 운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최근 젊은 사원들 중 2, 3명을 뽑아 1∼2년 장기 해외연수를 보내기로 한 중견기업 총무팀장 장모씨(38)의 고민은 갤러리 직장인들로 인한 문제점을 잘 드러내 준다.

“연수 보낼 사람을 뽑는데, 누가 실력이 뛰어난지가 아니라 누가 우리 회사에 오래 남아 있을 사람인지가 기준이 돼버렸습니다. 지원자의 대부분이 ‘공부만 시켜주면 회사 발전을 위해 쓰겠다’고 호언하는데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요.”

이런 ‘갤러리’의 양산을 막기 위해 회사들도 최근에는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추세다. IMF체제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했던 부서회식이나 정기 맥주파티, 사원 단합대회 등이 지난해부터 부쩍 늘어났다.

이 같은 고충은 일반기업뿐만 아니라 벤처업계도 마찬가지. 한 인터넷방송 사장(32)은 “직원들이 조금만 높은 연봉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면 미련 없이 회사를 옮기는 통에 장기계획은 고사하고 1년 단위의 중기계획도 세우기 힘들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올해 초 한 인터넷 쇼핑회사가 이례적으로 10년 근속자에게 포상금 500만원과 금 5돈, 15년 근속자에게 1000만원과 금 5돈 등 파격적인 포상을 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양대 경영학과 배종석(裵鍾奭)교수는 “갤러리 직장인 현상은 그동안의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대신 미국식 연봉제가 정착되면서 발생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직장인들 스스로가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것 외에 회사측은 핵심 인력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사원들에게 ‘회사가 나를 아낀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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