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기수의 재심 청구]"경찰고문 못이겨 거짓자백"

  • 입력 2001년 3월 21일 18시 39분


1972년 9월27일 발생한 강원 춘천시의 초등학생 강간살인사건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엽기적인 강력사건이었다. 11살이던 피해자 장모양은 주택가에서 멀지 않은 논두렁에서 발가벗겨진 채 강간당한 시체로 다음날 이른 아침 발견됐다.

사건발생 직후 당시 김현옥(金玄玉) 내무부장관은 10월10일까지 시한을 정해 범인을 검거하라고 경찰에 특별지시했고 경찰은 연수중인 춘천경찰서 수사과장까지 원대복귀시키는 등 범인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정씨 검거 경위〓경찰은 검거시한 하루 전인 10월9일 피해자 장양과 같은 동네에 사는 ‘왕국만화가게’ 주인 정진석씨(가명·당시 38세)를 ‘범인’으로 발표했다. 정씨는 지방의 2년제 대학을 나와 경북 청송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 등으로 일하다 68년 큰 아들이 뇌척수막염을 앓다 죽자 고향 춘천으로 돌아가 만화가게를 운영해왔다.

정씨는 사건발생 이틀 후인 9월29일 동네 술집 여자와 윤락을 했다는 이유로 즉심에 넘겨져 구류 5일을 선고받고 구금된 상태에서 용의자로 조사받았다. 그는 일단 10월4일 석방됐다가 다시 10월7일 경찰에 연행돼 조사받은 뒤 9일 범인으로 발표됐다.

정씨가 범인으로 지목된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만화가게 종업원 김모양(당시 16세)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당시 김양은 김씨와 내연관계를 맺고 지내다 헤어져 경기 문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는데 그곳에서 정씨에게 보낸 편지가 경찰에 압수됐다. 정씨는 변태성욕자로 의심받으며 추궁당했다.

경찰은 정씨의 만화가게에 자주 드나들던 한모씨(당시 10세)의 ‘증언’도 확보했다. 한씨는 “사건 당일 저녁에 정씨 만화가게에 TV를 보러갔다가 보지 못하고 가게 앞에 있을 때 피해자 장양이 가게 아래 동양여관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으며 집으로 돌아가다가 되돌아보니 만화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정씨 사건 일지

△72.9.28.장모양 피살체로 발견
△72.9.29.춘천경찰서, 정씨 연행해 5일간 조사후 석방
△72.9.30.내부부 장관, 10월10일까지 시한부 범인검거 지시
△72.10.7.춘천경찰서, 정씨 재차 연행
△72.10.10.춘천경찰서, 정씨가 범인이라고 발표하고 구속
△72.10.13.박정희 대통령, 10월 유신 앞두고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72.10.19.춘천경찰서, 춘천지검에 사건 송치
△72.10.27.10월 유신 선포
△73.3.30.춘천지법, 정씨에게 무기징역 선고
△73.8.9.서울고법, 검사 및 피고인 항소 기각
△73.11.27.대법원, 피고인 상고 기각(무기징역 확정)
△87.12.24.정씨, 15년2개월 복역후 가석방
△99.11. 정씨, 서울고법에 재심 청구

▽‘자백’경위와 고문 주장〓정씨에 대한 경찰의 최초 피의자 신문조서는 10월9일 작성됐다. 경찰에 재차 연행된지 이틀이 지난 뒤였다. 1차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정씨는 “피해자 장양을 강간살해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순순히 자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후 2, 3차 조서와 검찰 조서에도 자백은 그대로 유지됐다.

정씨는 당시 경찰이 무수한 고문과 가혹행위로 자백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행 직후부터 구타와 발로 걷어차기, 엎드려뻗쳐, 목봉을 끼운채 무릎을 꿇리고 구두발로 밟기, 토끼뜀, 비행기태우기, 물고문 등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당했다”며 “10월9일 새벽까지 이틀간 잠 한숨 안재우고 고문이 계속돼 나도 모르게 ‘그래, 내가 죽였다’고 절규했다”고 말했다.

그는 “검사가 조사할 때도 고문한 경찰관들이 뒤에 지키고 있었던데다 검사도 죄를 부인하면 더 무거운 처벌받는다고 해 자백을 번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재판과 그 이후〓정씨는 73년 3월 춘천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그 해 8월 서울고법, 같은 해 11월 대법원에서도 역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1심 변호사는 국선변호사로 함모 변호사가 선임됐고 2, 3심은 고 이범열변호사가 무료로 맡았다.

판결확정 후 정씨는 광주교도소로 이감돼 15년 2개월동안 복역하다 87년 12월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그는 산골로 내려가 자신의 누나가 죽으면서 유산으로 물려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서울로 이주한 부인은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다리를 절단했다.

강압수사 분위기 때문에 허위증언을 했다고 취재팀에 밝힌 목격자 한모씨는 지금 “어떻게 어두운 상태에서 100m,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별했겠느냐”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이명건·이정은기자>gun43@donga.com

▼당시 유죄영향 증언 한모씨 "경찰 겁나 시키는대로 했다"▼

72년 사건 당시 경찰과 검찰, 법정에서 “사건발생 직전 피해자 장모양이 정씨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진술한 한모씨(39)는 13일 강원 홍천 자택에서 기자에게 “경찰이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며 72년의 진술을 뒤집었다.

―사건 당시 장양이 정씨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해 정씨의 유죄 입증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렇게 진술한 것은 맞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씨 가게쪽으로 장양이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가게로 들어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는가.

“경찰에서 그냥 ‘사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경찰이 장양을 본 것으로 유도 신문해 겁이 나서 그렇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사탕을 사주었다.”

―검찰과 법정에서도 똑같은 진술을 했는데.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번복하기가 어려워 그랬을 것이다.”

―그 때 일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그 사건 때문에 일생에 딱 한번 경찰조사를 받은데다 어릴 적 충격이 너무 커 진술경위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소감은.

“경찰이 짜맞추기 수사를 했고 나는 경찰이 시키는대로 “네, 네” 했다. 나는 당시 열 살로 정말 어리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리고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면 적어도 정씨가 진범이라는 혐의를 약하게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정말 가슴이 무겁다.”

<홍천〓이명건기자>gun43@donga.com

▼당시 수사검사-재판 판사 "내용 기억 안나"▼

취재팀은 정씨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당시 수사검사와 피고인의 얼굴을 직접 보며 재판했던 1, 2심 재판부 판사 4명을 취재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변호사로 활동중이고 항소심 판사 한 명은 작고했다. 그러나 이들은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탓인지 사건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사검사였던 정모(60)변호사는 “최근 정씨가 재심을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고 다른 사건과 기억이 얽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또 기억이 난다 해도 검사는 기록과 공소장으로만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심 재판장이었던 윤모(67)변호사는 내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초임 배석판사로서 재판을 지켜본 현직 김모(54)판사는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주심 판사가 아니어서 사건내용은 정확히 모른다. 피고인이 무죄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만화가게에서 일하던 여종업원과 내연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해 재판부가 무죄주장을 믿지 못한 것도 같다.”

김판사는 당시 정씨가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강하게 주장해 늦은 밤에 사건 현장에 나가 검증도 하고 재판도 1심 구속기간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진행됐다고 기억했다.

항소심 재판장이던 박모(76)변호사와 주심판사였던 김모(68)변호사는 “전혀 기억이 없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특히 김변호사는 취재팀이 들고 간 판결문을 꼼꼼히 읽어본 뒤 “도장을 보니 내가 주심이 맞는데 기억이 없다”며 “당시 고등법원에는 사건수가 워낙 많아 충분한 심리를 하지 못했고 1심 판결에 무리가 없는지만 겨우 살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한편 배석판사였던 오모(64)변호사는 “당시 이범열(李範烈)변호사가 사무실에 찾아와 ‘피고인은 정말 억울하다. 열심히 해서 무죄를 밝히겠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고 증언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왜 '30년전 사건' 추적하나▼

지난해 말 한 노인이 본보 취재팀을 찾아왔다. 그는 72년 9월 발생한 강원 춘천시 초등학생 강간살인사건의 피의자였던 무기수 정진석씨(68·가명). 그는 교도소에서 15년2개월을 살았다. 그에게 더 큰 형벌은 가족과 이웃과 세상에서 멸시받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15년을 남도의 산골 마을에 혼자 숨어 살아왔다.

2년 전부터 시작된 중풍 증세로 왼쪽 팔을 제대로 못쓰는 그는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씨 사건은 본보 취재팀에게 낯설지 않은 사건이었다. 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법복을 벗었던 고(故) 이범열(李範烈)변호사는 94년 법조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씨 사건만 생각하면 창자가 부글부글 끓는다”고 적었다. 고문에 의해 조작되고 잘못된 재판에 의해 실체가 뒤바뀐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이변호사는 정씨의 항소심과 상고심을 무료 변론했다. 이변호사는 96년 타계 직전 정씨에게 사건기록을 넘겨주며 “재심을 청구해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취재팀은 정씨 재심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과 함께 1000쪽이 넘는 사건기록과 빛바랜 1∼3심 판결문을 꼼꼼히 읽고 분석했다. 또 강원 춘천 홍천과 충남 천안, 경남 진주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사건 당시 증인들을 찾아 취재했다.

진실이 없으면 정의도 없다. 정씨 사건의 유일한 증거였던 정씨의 경찰 자백은 의문투성이였고 주변인물의 증언은 엉성했다. 정씨가 무죄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취재팀은 그에 대한 유죄의 증거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취재팀은 이 사건을 다시 검증해보기로 했다. 99명의 범인을 잡는 것 못지 않게 1명의 억울한 사연을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70년대 당시 공권력이 어떻게 수사를 진행했는지, 그리고 사법(司法)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따져 볼 것이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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