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료계긴박했던 하루]"정부案 수용"서 강경론 선회

  • 입력 2000년 6월 24일 00시 05분


▼정부-의료계 긴박했던 하루▼

23일 의료대란이 해결될 듯한 분위기가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 무르익다 깨졌다.

이날 오전 7시반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의료대란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 당정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이한동(李漢東)총리서리가 주재해 3시간 반이나 계속됐다.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오전 11시20분경. 이총리서리와 차흥봉(車興奉)보건복지장관, 민주당 이해찬(李海瓚)정책위의장이 기자회견석에 앉자 온 국민은 숨을 죽였다.

의약분업은 예정대로 다음달 1일부터 시행하지만 약사법 개정과 의보수가 인상 등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보완책이 발표됐다.

차장관은 “의료계가 계속 폐업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정부안을 수용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오전 11시30분경. 당정회의 결과를 기다리던 의사협회의 첫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정부가 의료체제 전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료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는 지도부의 평가도 나왔다. 대한병원협회도 병원진료를 원상회복시켰고 시민단체들은 의보수가 인상에 반대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진료를 정상화하는 방식에 모아졌다. 집행부가 폐업 철회를 선언하느냐, 아니면 폐업 찬반투표로 의사들의 뜻을 묻느냐는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나 의협의 우호적인 반응은 오후에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의사협회와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집행부는 이날 정오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3시간 반 동안 계속되는 사이 의협 앞마당에 진을 치고 있던 전공의와 개원의 등 회원들은 “정부안이 의료계 요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선 보완 후 시행’ 원칙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와 별도로 오후 2시경 열린 의쟁투 중앙위원회도 ‘극한투쟁론’이 대세를 이뤘다.

의협 집행부는 회원들의 정서가 악화되자 “회원들의 동의 없이 정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결국 의사협회 전국대표자회의는 이날 오후 4시10분경 정부안을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발표하는 의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차장관의 표정은 어두웠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못 돌아가" 여전히 강경한 입장▼

의료계의 집단폐업 사태를 사실상 이끌어온 전공의와 개업의들은 23일 발표된 정부의 의약분업 수정안에 대해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기존의 정부 입장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며 대한병원협회의 폐업 철회 선언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진료에 복귀하지 않을 것임을 결의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서울대의 한 전공의는 “의사협회가 제시한 ‘선보완 후시행’이라는 의약분업의 시행원칙에 정부가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며 “그렇지 않는 한 폐업철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연세대 전공의 600여명는 이날 오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정부의 당정협의안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당분간 진료 현장에 복귀하지 않을 것을 잠정 결의했다.

서울중앙병원 박종철(朴鍾哲·30·소아과)전공의협의회장은 “정부가 9월에 약사법 개정을 공신력있게 약속했다면 의사들은 이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컸으나 정부는 ‘고려하겠다’는 모호한 말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개업의들은 의료보험수가 등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알맹이가 없다는 데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S통증클리닉의 이모원장은 “정부안은 의료보험수가 및 진찰수가의 현실화 등 ‘알맹이’ 없는 탁상공론”이라며 “이 정도 수준으로는 대다수 개업의들이 폐업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서울 종로구 Y신경외과의 김모원장도 “극심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 뻔한데도 의약분업을 강행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며 “폐업이 장기화하면서 피해가 막심하지만 이대론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개업의들의 분위기”라고 전했다.

<윤상호·이헌진·이승헌기자> ysh1005@donga.com

▼"못 떠나" 집단사직서 제출 교수들 자원봉사자로 환자돌봐▼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23일 상당수의 병원에서는 교수들이 사직서 제출 뒤에도 자원봉사자로 변신해 환자들을 계속 돌보고 있다.

이는 의사협회가 정부의 종합대책안을 거부한 뒤 이날 오후 뒤늦게 의대 교수들에게 응급실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기 이전에 의사들 스스로 결정한 입장이다.

211명의 교수가 사직서를 낸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응급의학과 서길준교수 등 14명의 교수와 3명의 전공의가 가운을 벗고 가슴에 ‘자원봉사자’ 명찰을 달고 환자를 돌보았다. 이대 목동병원에서도 6명의 의사가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환자를 돌보았다.

100여명의 교수가 사직서를 제출한 한양대의료원에는 응급의학과 정파종(鄭巴琮)교수 등 일부 교수들이 자원봉사자로 변신했다. 교수직을 버리더라도 의사 자격은 갖고 있으므로 일반의사로서 이 병원의 환자를 위해 자원봉사한다는 것.

“오전에 정부발표 내용을 보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이제 병원을 떠나야겠다고…. 하지만 환자 곁을 떠나지는 못하겠더군요.”

자원봉사자로 나서기로 했다는 한양대의료원의 한 교수는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정부가 의사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더군요. 죽어도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그러나 자원봉사자제도는 법적인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 병원소속이 아닌데 입원을 권유할 수도 없고 자원봉사자로 근무할 때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도 문제. 이에 따라 한양대의료원에서는 자원봉사 의사들이 처방을 내리되 수술 및 입원을 권유하는 행위는 모두 병원장 명의로 하는 방법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사직서를 내지 않은 병원장이 병원 대표로서 책임지는 방안인 셈이다.

<허문명·이원홍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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