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폐업병원도 '빽'이면 통한다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59분


의료계의 집단폐업으로 모든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헤맬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병원 서비스를 받는 ‘빽 좋은 고객’들이 적지 않다.

처음 병원을 찾는 초진환자는 ‘거부’하기로 원칙을 정한 서울 A병원. 22일 이 병원 원무과에 한 고급공무원이 전화를 걸어 “장모의 요통을 봐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 공무원의 장모는 초진접수를 하고 일반 외래병동에서 요통치료를 받은 뒤 약을 타 갖고 귀가했다. “이 관리의 직책상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게 병원측 설명.

B병원 홍보실직원 김모씨(35)는 “폐업 이후 가벼운 상처를 입은 환자를 봐달라거나 약을 타달라는 일부 ‘힘있는 계층’의 민원이 여러 창구를 통해 심심치 않게 들어오고 있다”고 전한다. 이 병원 홍보실에서 폐업기간 중 처리한 ‘민원’은 하루 평균 10여건.

이런 ‘민원성 환자’들은 평소 같으면 신청한 뒤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과장급 의사들의 특진을 의료대란 기간에 손쉽게 즐기는 격이다.

아는 의사 ‘빽’을 통한 진료도 조용히 이뤄지고 있다. 서울 C대학병원 순환기내과 김모교수(42)는 “고혈압으로 어머니가 잠시 정신을 잃으셨다”는 고교동창의 전화를 받고 환자를 병원으로 불러 진료하고 약을 줬다. 같은 병원 이비인후과 박모교수(43)도 “만성비염으로 아내가 힘들어한다”는 고향후배를 병원으로 불렀다.

서울 D병원 행정팀의 임모이사(43). 그는 “병원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민원은 거절하기 힘들다”며 “거절하는 의사에게는 빌다시피 해 민원을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이사는 “병원 운영상, 교수들의 인정(人情)상 어쩔 수 없이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의료기관이 정상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성엽기자>interne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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