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대출 '부익부 빈익빈'…은행, 컴퓨터로 평가

  • 입력 2000년 2월 7일 19시 48분


시중에 돈이 넘쳐나고 있지만 서민들이 은행 돈을 빌려 쓰기는 더 어려워졌다.

은행들이 컴퓨터를 이용한 신용평점 시스템을 앞다퉈 도입하면서 소득이 많고 직업이 확실한 우량고객에 대해서는 각종 혜택을 부여하는 반면 신용도가 떨어지는 서민층에는 신용대출 해주기를 꺼리기 때문.

지점 창구마다 대출을 거절당한 고객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일부 은행은 지점장 재량권을 확대하는 등 불만 수습에 나섰다.

▽은행대출 ‘부익부 빈익빈’〓신용평점 시스템이란 대출 신청인이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빌려준다면 얼마를 어떤 이자로 빌려주는 게 타당한지를 컴퓨터를 통해 판단하는 제도.

개인의 직업 연간소득 재산보유현황 연체경력 등이 입력돼 대출 여부와 한도, 금리 등이 자동 결정된다.

상반기 중 이 제도를 실시할 예정인 국민은행이 최근 기존 대출고객을 대상으로 모의실험을 실시한 결과 하위 30%가 ‘돈을 빌려주면 안될 사람’으로 분류됐고 상위 20%는 지금보다 더 낮은 금리를 적용받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은행들의 분석에서도 대출 불가 판정 비율이 20∼35%에 달했다.

새 시스템의 대출심사가 까다로운 이유는 주요 판단을 데이터에만 의존해 개인의 상환의지나 향후 예상 수입 등이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 예컨대 상장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경우 직장점수는 높지만 소득기록이 전혀 없어 대출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정부의 연대보증 개선안에 따라 1인당 보증한도가 1000만원으로 제한된 것도 서민층의 은행 문턱을 높이는 요인.

국민은행 가계금융부 손홍익 과장은 “원리금을 꼬박꼬박 내고도 소득이 적다는 이유로 대출 만기연장이 거절되는 사례가 나올 것에 대비해 지점장 재량권을 확대하고 전면시행 시기를 늦추는 등의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 최근에는 일부 은행들이 대출고객에게 예금이나 신용카드 가입을 은근히 권유하는 ‘꺾기’ 관행이 다시 고개를 들어 금융당국이 해당 기관에 엄중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문직 종사자나 상장기업 임직원 등 신용등급이 높은 우량고객들은 금리가 1∼4% 포인트 낮아지고 대출한도도 종전 2000만∼3000만원에서 3000만∼5000만원으로 늘어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부작용은 없나〓은행들은 주택 등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으면 얼마든지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서민이 담보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

1월 중순부터 이 제도를 시행 중인 한빛은행 홍승길 여신정책팀장은 “야박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은행으로서는 자금운용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외환위기 직후 7∼8%까지 치솟았던 은행들의 가계대출 연체율은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1% 안팎으로 뚝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은행 신용대출에서 소외된 계층이 금리가 비싼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 쪽으로 밀려나는 사태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또 다른 사회문제가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조흥은행 서춘수 재테크팀과장은 “스스로 신용도가 낮다고 판단하는 고객은 모든 금융거래를 주거래은행 한곳으로 몰아 평소에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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