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김민수 前교수, 재임용탈락 취소訴 승소

  • 입력 2000년 1월 18일 23시 15분


‘계란으로 바위 치기.’

서울대 사상 처음으로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 전 미술대 산업디자인학과 조교수 김민수(金珉秀·39)씨는 국립 서울대를 상대로 벌여온 1년4개월여간의 ‘싸움’을 이렇게 압축했다.

▼김씨 "괘씸죄 걸려 탈락"▼

김씨는 “학계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고 원로 교수의 친일행적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부당하게 탈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대는 “3차례의 심사에서 모두 ‘연구 실적 미달’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재임용 여부는 학교의 고유 재량”이라며 무시했다.

김씨는 결국 법원의 문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했고 법원은 18일 학교나 재단의 절대적 권한을 인정하던 교수 재임용제도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한 변호사는 이 판결에 대해 “법(法)의 힘이 실린 계란이 바위를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판결〓서울 행정법원 행정13부(재판장 이재홍·李在洪 부장판사)는 이날 김씨가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교수 재임용 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김씨의 재임용 심사가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공정한 심사를 거쳤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서울대측은 재임용 탈락의 근거가 된 ‘연구실적 기준 미달’의 구체적 심사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입증할 책임이 있는데도 아무런 주장이나 입증을 하지 않았다”며 “김씨의 재임용을 거부한 조치는 위법하다”고 밝혔다.

▼학교측 전횡에 첫 제동▼

▽의미와 파장〓재판부는 “재임용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은 학교측의 고유 재량이므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기존의 판례와 서울대측의 주장을 뒤집었다.

“헌법 이념상 신분 보장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학문 연구의 주체인 교수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재임용 심사를 신청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충분히 그 부당성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논지다. 지금까지의 관행과 법원의 판례는 ‘프로 야구구단(학교)이 선수(조교수)와 4년 연봉계약을 했다면 4년 후 그 선수와 다시 계약할지 여부는 그동안의 성적 등을 보고 구단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안영수(安永洙)변호사는 “이 판결은 지금까지 사법적 통제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학교와 재단측의 자의적인 임용권 행사에 처음 제동을 걸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씨도 “우리 나라에 상식이 살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재판부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사건의 전모〓94년부터 조교수로 재직해온 김씨는 96년 10월 교내 학술 심포지엄에서 미대 원로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고 선배 교수의 견해를 비평했다. 98년 7∼8월 미대 인사위원회와 대학본부 인사위는 3차례의 심사를 거친 끝에 재임용에 필요한 연구실적물의 4배인 8편의 논문을 제출한 김씨를 ‘연구실적 미달’이라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김씨는 ‘괘씸죄’가 탈락의 진짜 이유라고 주장하며 출근과 학점 없는 강의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투쟁의 대열에 동료 교수와 학생들이 동참했다.

지난해 12월 서울대 교수 38명으로 구성된 ‘김민수교수 복직을 위한 공동 대책위원회’는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숫자인 교수 320여명의 서명을 받은 탄원서를 대학본부측에 제출했다.

지난해 2학기 김교수가 담당하던 ‘디자인과 생활’ 과목에는 동료 선후배 교수 14명이 번갈아가며 ‘릴레이 강의’를 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학점이 인정되지 않는 이 강의를 들을 만큼 화제가 됐다.

김씨는 “내 사무실에 복직을 바라는 부적을 붙여가며 격려해준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강단에 복귀하면 더욱 연구와 강의에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서울대 판결불복 항소키로▼

이에 대해 서울대측은 “재임용 부적격 판정을 내린 심사위원들의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며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부형권·이헌진기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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