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재조사]『반인륜 대량학살』 美 언론에 밀려

  • 입력 1999년 10월 1일 20시 28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미군양민학살사건 대책위의 5년에 걸친 끈질긴 요청에도 꿈쩍하지 않던 미국 정부가 이 의혹의 재조사에 동의했다.

지금까지 미국의 입장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학살을 자행한 부대로 지목된 미군 제1기갑사단이 노근리 주변에 주둔했다는 증거조차 없다는 것. 둘째는 학살이 있었다고 해도 미국은 한미 군대지위협정의 민사청구권 조항에 따라 전투활동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배상할 수 없다는 것.

문제의 AP통신 보도가 나간 지난달 29일(미국시간)에도 미 국방부는 “육군군사기록센터가 올해초 공식기록을 조사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면서 재조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하루 만인 30일 철저한 재조사로 선회했다.

미 국방부의 기본 시각은 이 사건이 피아를 가리기 어려운 전쟁 중에 일어난 일탈행위에 불과하며 또 참전군인들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백악관은 언론이 이 사건을 반인륜 범죄인 대량학살(genocide)로 규정하는 데 대해 정치적 부담을 느낀 것 같다.

AP통신 이외에도 일간지 뉴욕타임스 LA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 ABC NBC 등 방송들이 취재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49년동안 침묵하던 사건 관련자들의 육성증언. 1일자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기관총사수 에드워드 데일리는 “많은 한국전 동료들이 증언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정신적 안식을 되찾기 위해서는 진실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증언으로 미 육군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현장방문과 방증자료 검토에까지 조사범위를 확대하게 됐다.

루이스 칼데라 육군장관은 30일 기자회견에서 “조사에는 1년 이상 소요되며 P T 헨리 인사담당차관보가 이를 지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칼데라장관은 “당시 미군 병사들이 매우 힘든 여건에서 위대한 용기를 갖고 싸웠지만 제2차 세계대전 뒤여서 제대로 훈련받거나 장비를 갖추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해 미군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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