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믿을곳 없다…「정리해고」大法판례따라 언제든 가능

  • 입력 1997년 11월 28일 20시 20분


극심한 경제난 속에 정리해고 등 전례없는 대규모 감원태풍이 몰아치면서 직장인들이 무력감과 당혹감으로 근로의욕을 잃어가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처지에 놓인 근로자들은 그동안 어느 정도 방패막이 역할을 해온 노조의 힘마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러나 노동부는 고용안정 대책은커녕 정리해고가 어느 선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조차 없이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근로의욕 상실〓상당수 직장인들은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대규모 감원이 언제든지 가능한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돼 가는데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상업은행 대리 유모씨(35)는 『현행 노동법이 정리해고제 시행을 2년간 유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 대규모 정리해고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며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S그룹의 정모씨(34)는 『대기업들이 근로자들과는 아무 상의없이 마치 칼로 무를 자르듯 몇십%를 감원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니 지난 겨울 추위에 떨며 총파업을 벌여 이뤄낸 성과가 물거품이 된 것 같아 비애를 느낀다』며 한숨지었다. ▼노조의 무력(無力)〓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강력 대응을 공언하고 있지만 상당수 근로자들은 『이런 경제상황에서 총파업이 가능하겠느냐』며 무력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많은 근로자들은 『그동안은 노조를 방패막이 삼아 의지해왔지만 이젠 혈혈단신 내던져진 심정』이라고 답답해 했다. 한 노조 간부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최대의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노총 최대열홍보국장은 『노동법을 재개정하면서 날치기노동법에 신설됐던 광범위한 정리해고 사유를 삭제하고 시행을 유보한 것은 해고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반영된 것』이라며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리해고가 지금도 가능하다 해도 노동법 재개정 정신이 이처럼 무시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정부 무대책〓최근 금융계 등에서 「기업의 양도 합병시에도 정리해고가 가능한가」 등 정리해고의 허용범위를 놓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으나 노동부는 방관하고 있다. 정리해고 발생시 부당해고인지 여부를 심판하는 각 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도 지방마다 제각각이어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근로자 보호를 위해 정리해고 시행을 2년 유예했는데 오히려 그 유예조항 때문에 정리해고가 더 광범위하게 허용되는 모순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홍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