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10주년 ④]6월세대의 「착잡한 오늘」

  • 입력 1997년 6월 13일 20시 29분


87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은 흔히 6월항쟁 세대로 불린다. 역사의 현장에 섰던 「젊은 사자들」은 대부분 지금 30대로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의 손으로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하면 착잡하기만 하다. 『모리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과 부정부패가 여전한 현실을 보면서 도대체 6월항쟁의 결과가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허무감마저 느낍니다』 6월항쟁 당시 대학도서관을 뛰쳐나와 서울시청 앞에서 「독재타도」를 외쳤던 金永煥(김영환·31·회사원)씨의 말이다. 6월항쟁 세대는 자신들을 「샌드위치 세대」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합리적인 척 하지만 권위주의의 틀을 못벗어났고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헉헉대는 40∼50대, 이기적이고 타인과 현실정치에는 무관심한 신세대 사이에 낀 세대입니다』 〈金根勇(김근용·34·회사원)씨〉 『유교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직장문화를 민주적인 분위기로 변화시키는데 30대의 역할이 컸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정치 문제만 나오면 보수적인 40∼50대와 탈정치주의적인 신세대에 끼여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선우(이선우·35·교사)씨〉 대학시절 비판적인 사회과학 서적 한 두권을 읽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도 없었던 세대. 제도권 정치에 불만이 많은 비판의식이 강한 세대. 그러나 어느덧 기성세대에 편입돼가는 세대가 30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런가 하면 6월항쟁 이후 대학가에 불어닥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학생운동을 계속하고 졸업후 노동운동에 뛰어든 사람들도 적지않다.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못해 지금도 교도소에 수감중인 김모씨(35·서울대졸).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사회주의국가의 붕괴로 회의를 느껴 현실로 돌아왔지만 생활방편이 없어 재벌의 노사관리자가 된 박모씨(33·연세대졸). 운동권에 머물다 문민정부 출범 후 정치권에 들어가 부패한 정모씨(35·고려대졸). 6월항쟁 세대의 또 다른 모습들이다. 한편 6월항쟁을 주도한 학생 운동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국민 공감대에 기초한 슬로건과 비폭력주의로 지지를 얻었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민족해방계열내 여러 분파중 주체사상파에 의해 장악돼 갔다. 6월항쟁 당시에도 핵심 운동권은 민족해방계열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그 내부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부가 6월항쟁 당시 「직선제 개헌」같은 온건한 슬로건을 내건 것은 「사회주의 계급혁명에 앞서 민주주의 쟁취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이론에 근거한 전술적 측면이 있었다. 민족해방계열의 미미한 일개 분파에 불과했던 주사파는 87년말 이후 민족해방계열내에서 벌어진 「사회구성체 논쟁」을 거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남한은 식민지 반봉건사회이므로 북한 노동당의 지도하에 민족해방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특히 핵심운동권 내부에서 벌어진 「조국통일논쟁」을 계기로 주사파는 88년부터 학생운동의 핵심지도부 조직을 완전장악하고 독주해온 것. 학생운동권은 이후 5공청산 시위와 통일운동 등을 벌여나가면서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있던 일반학생들의 호응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학생운동 지도부는 일반 학생 및 시민들을 의식하지 않는 과격한 폭력성과 친북 일변도의 노선을 걷는 바람에 마침내 6월항쟁 10주년을 맞은 현재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기홍·이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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