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10돌]이땅에 「민주화 터전」 이룩

  • 입력 1997년 6월 10일 07시 47분


《군부의 오랜 강권통치 체제를 해체하고 문민정부 탄생의 터전을 마련한 87년 6월항쟁이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5공 정권의 대국민 항복을 이끌어낸 시민항쟁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당시의 열악한 인권 상황 △6월 항쟁의 의인(義人)과 단체 △주역들의 현주소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6월항쟁의 평가와 정신계승 등에 관한 좌담회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6월 민주항쟁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87년6월19일 자정 무렵. 權福慶(권복경)치안본부장은 무전기를 옆에 켜놓은 채 집무실내 간이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 청와대내 안가(安家)에서 열린 공안장관회의에 참석했다가 全斗煥(전두환)대통령에게 치안상황에 대해 전화로 보고한 내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부산이 좀 위태롭긴 합니다만 경찰력으로 진압이 가능합니다. 유능한 지휘관과 정예부대를 부산에 특파했고 내일이 토요일이라 모레까지는 문제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위를 막을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 최루탄에 의지해 겨우 시위를 진압해오던 터였는데 남은 최루탄은 겨우 1만7천4백여발에 불과했다.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린 날에 맞춰 벌어진 「6.10 朴鍾哲(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과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연일 계속된 시위는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80년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하고 탄생한 전두환정권은 안기부 기무사 검찰과 경찰을 동원한 강권통치로 정권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망과 저항은 잠재울 수 없었다. 6월 항쟁의 결정적 계기는 87년1월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경찰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등과 함께 5공 정권의 상징적인 인권유린사건으로 기록된 박군 고문치사사건은 공안기관들의 경쟁적인 시국사건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필연적」사건이었다. 전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폭로사건(5.18)도 민주화 열기를 이어주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6.10 국민대회」는 6월 항쟁이란 역사적 사건의 분수령이었다. 이날 오후 6시 덕수궁 옆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광복 42년을 상징하는 42번의 종소리가 울리자 시청앞을 지나는 수백대의 차량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전국 곳곳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불렀다. 이날 대회는 이전까지 시위가 대학생 위주였던 것과는 달리 일반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바로 전날 연세대 교내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李韓烈(이한열)군이 의식불명상태에 빠진 사건이 국민감정을 촉발했다. 이즈음 시위도중 경찰에 붙잡힌 대학생이 시민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고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는 경찰에 거세게 항의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날 시위는 전국 5백41곳에서 벌어졌다. 6월 19일을 전후해서는 시위가 전국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부산의 경우 시위대가 도심을 장악하고 KBS건물을 포위했다. 주말에 내린 폭우와 여야영수회담을 계기로 잠시 주춤하던 시위는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을 계기로 다시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경찰은 주변 인파를 포함해 이날 시위에 1백만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직장인을 비롯한 중산층의 시위참여와 심각한 상태에 이른 민심이반은 정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치안본부가 88년에 발간한 「1987, 그 격동과 경찰」은 「넥타이를 맨 중산계층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하고 나섰을 때는 절해고도에 떨어져 있는 듯한 고독과 소외감마저 맛보아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동성당 농성(6월10∼15일)과 부산 광주 등 지방으로의 시위확산을 계기로 군동원을 검토하던 정부는 마침내 6월29일 「대국민 항복선언」을 내놓았다. 직선제개헌 언론자유보장 등 8개항의 「6.29선언」이 발표되자 전국은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시민과 경찰은 거리에 널린 돌멩이와 최루탄 조각 등 시위잔재를 함께 치우며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동아일보는 이날 「우리는 위대한 국민이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는 용기있는 국민이었으며 어떤 난국도 지혜롭게 뚫고 나갈 줄 아는 일등국민의 대열에 섰다는 것을 마지막에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해 12월의 대통령선거는 야권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3김씨가 각자 출마하는 바람에 盧泰愚(노태우)민정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6월 항쟁으로 국민은 「6.29선언」이란 항복선언을 받아냈지만 6월 항쟁에 담긴 민주화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역사로 남아 있다. 崔章集(최장집·정치학)고려대교수는 『6월항쟁이 군부 권위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나 이를 토대로 탄생한 문민정부가 당시 민주화의 열망을 토해낸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교수는 『6월항쟁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리더십 형성과 정경유착 근절 등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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