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한영씨 피격/망명서 참변까지]작년 이미 테러 예감

  • 입력 1997년 2월 16일 14시 33분


『신문은 괜찮지만 TV에 제 얼굴이 나가면 성질 급한 김정일이 남한의 고정간첩을 시켜 저를 암살할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2월 성혜림 일가 망명사건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씨가 당시 취재기자에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수차례 반복하던 말이다. 어려서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아온 만큼 불같은 김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이씨였다. 『김일성이 죽은 후 김을 제어할 사람은 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말았다. 특히 이씨는 한국에 망명한 뒤 미국에 은신중인 것으로 알려진 어머니 성혜랑씨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중 이같은 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씨의 망명사실은 14년간 당국에 의해 숨겨져왔다. 이씨의 안전문제도 고려하고 김정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그만큼 이씨가 가진 정보가 예민했다는 증거다. 이씨는 이름을 이일남에서 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성형수술까지 하며 자신의 신분노출을 피해왔다. 이씨는 지난해 취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4년간의 남한생활을 『자본주의 수업료를 톡톡히 지불한 세월이었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다』는 말로 요약한 적이 있다. 이씨는 망명 직후 서울 고덕동 주공아파트를 특별분양받아 살면서 지난 84년 3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다른 귀순자보다 특별대우를 받은 이씨였지만 남한생활에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자신이 남한의 「오렌지족」에 해당하는 북한의 「놀세족 원조」라고 반농담으로 말했듯이 북에서도 워낙 특별대우를 받은 이씨는 대학에 다니면서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핀란드 교포학생이라고 동료학생들을 속이고 집을 저당잡힌 돈을 유흥비로 날리기까지 했다. 그는 이때의 생활을 『돈을 쓸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소외감을 느꼈다』고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여관방에서 「내가 그리던 자유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당시 이씨의 생활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씨가 어느 정도 남한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졸업후 KBS 국제국 러시아방송 PD로 일하면서부터. 그는 87년말 당시 모델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90년 KBS에서 퇴직한 이씨는 조합주택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러다가 금방 재벌이 될 줄 알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나 분쟁에 휘말려 업무상횡령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감금됐다. 이씨는 94년1월 무죄로 석방된 뒤부터 정보당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평범하고 착실한 생활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당국과 타고난 「끼」를 발산하려던 이씨간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 이후 이씨는 당국의 충고를 무시하고 각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인생 자체를 상품화하려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씨는 성씨 망명사건이 잠잠해진 이후 자신의 자서전으로 약간의 돈을 마련했지만 빚을 갚는데도 부족했다. 이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평범하지 못한 나를 믿고 결혼한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도 마음잡고 살아야겠다』며 러시아를 상대로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발판으로 재기를 꿈꾼 것. 이씨는 사업에 열중하다가도 가끔 취재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왜 당국이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지 않느냐』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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