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공유하기
기사 124
구독 59

김종관 감독의 영화 ‘최악의 하루’(2016년)에서 은희는 서울 서촌에서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마주친다. 애정 문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하루의 끝자락, 은희는 남산에서 다시 료헤이와 만난다. 짧은 영어로 간신히 소통하던 은희는 료헤이에게 일본어로 아무 말이나 해보라고 한다. 료…

한가람 감독의 영화 ‘아워 바디’(2019년)에서 자영은 8년째 행정고시에 도전하다 스스로 시험을 포기한다. 조선 후기 학자 윤기(1741∼1826)는 과거에 연이어 낙방한 뒤 다음 시를 남겼다. 이 무렵 시인은 생원시 2차 시험인 회시(會試)에서 최고 성적을 얻었지만 알 수 …

대입 시즌이 시작됐다. 합격한 소수의 기쁨 뒤에는 불합격한 다수의 슬픔이 있다.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한시에서도 낙방은 많이 읊은 주제 중 하나였다. ‘당시유원’(唐詩類苑)에서는 ‘낙제(落第·과거 시험에 떨어짐)’란 항목을 별도로 두기까지 했다. 당나라 시인 가도(779…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년)에서 주인공인 열네 살 은희가 1990년대를 살아간 지극히 보편적인 소녀였다면, 1902년 열네 살이 된 오효원(1889∼?)은 차별받는 여성으로 태어나 시로 명성을 얻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은희는 아들만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오빠에게 맞으며 컸…

조선 후기 문신 이시원(1790∼1866)은 회갑 날 10촌형 이휘원에게 시 한 수를 받았다. 지금과 달리 오래 사는 이가 드물었던 시절, 회갑연은 장수를 축하하는 특별한 행사였다. 하지만 회갑을 맞은 당사자로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서글픔도 뒤따른다. 이미 회갑을 …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산딸기’(1957년)에서 여든이 다 된 주인공 이삭 보리는 박사학위 취득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한다. 조선 후기 문신 정기안(1695∼1775)도 여든 되던 해 소과(생원·진사를 뽑던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념한 의식에 다녀온 뒤 다음 시를 남겼다. …

64세를 일컫는 말로 파과(破瓜)가 있다. 오이 과(瓜)의 자획을 풀어 나누면 여덟 팔(八) 두 개가 되기 때문(八 곱하기 八은 64)이다. 파과는 청춘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덟 팔(八) 두 개는 16(二 곱하기 八)도 된다. 노년이 청춘과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임을 시사한다. 린지 …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시테라섬으로의 여행’(1984년)에는 늙은 망명객의 귀국 여정이 펼쳐진다. 그리스 정치 현실에 절망해 35년간 망명했다 돌아온 그는 가족과 해후하지만 끝내 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중국 난퉁(南通)으로 망명한 김택영(185…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1966년) 속 주인공은 당나귀로, 영화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790∼816)는 늘 당나귀를 타고 나가 당나귀 위에서 시를 짓곤 했다. 그는 특히 ‘말(馬)’을 제재로 수많은 시를 남겼다. 이는 한시사에서도 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년)에서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는 경기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화가 윤희정(김민희)을 만난다. 그들이 처음 마주친 복내당에서 비장청 방향으로 내려가면 유여택(維與宅)이 나온다. 정조(1752∼1800)가 현륭원(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

정진우 감독의 영화 ‘경복궁의 여인들’(1971년)은 고종의 사랑을 엄 상궁에게 빼앗긴 민비의 질투를 그렸다. 민비 쪽 궁녀가 고종과 엄 상궁의 밀회를 염탐할 때 민비의 처지처럼 외로이 걸린 주련 한 짝이 화면을 스쳐 지나간다. 주련(柱聯)은 한시 구절을 새기거나 써서 전통 건축물 기…

형가의 진시황 암살 미수 사건은 한시와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장이머우 감독은 ‘영웅’(2002년)에서 이 사건을 새롭게 형상화했다. 조선 시인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협객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는데, 형가의 일을 색다른 방식으로 포착했다. 시의 첫머리에 ‘유주의 말…

이마무라 쇼헤이와 박찬욱 감독은 동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개인적 복수를 다뤘다. 사마천이 쓴 ‘자객열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형가(荊軻)는 타인을 위해 복수에 나섰다. 도연명(陶淵明·365?∼427)은 이 사건에 주목해 다음 시를 썼다. 시는 형가가 연나…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년)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투 장면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의 작은 섬에 파병된 이탈리아 병사들은 사령부와 연락도 끊긴 채 주민들과 어울려 지중해의 햇빛 아래 뛰어논다. 이런 역설적인 한가로움은 조선 중기 임제(林悌·15…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영광의 길’(1957년)에는 적군의 요새로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기 전날 밤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총검에 찔리기보단 기관총에 맞는 게 낫다거나 폭탄이 제일 두렵다는 등 어떻게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까 고민한다. 그러다 죽고 싶지 않은 것만큼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