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갈등에 꼬인 KTX역… 185억 들여 하루 이용 380명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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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 사업 추진 방식 바꾸자]<上>지역 이기주의 악순환
[신공항 후폭풍]

국토-국방장관 신공항대책 논의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영남권 신공항 연구용역 결과 발표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관계장관 회의가 열렸다. 왼쪽부터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국토-국방장관 신공항대책 논의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영남권 신공항 연구용역 결과 발표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관계장관 회의가 열렸다. 왼쪽부터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하루 이용객 500명.’

충남도가 올해 개통 1주년을 맞은 호남고속철도 공주역의 활성화를 위해 내건 목표다. 공주역 사업은 충남의 철도 관문을 세우겠다는 야심 찬 목표로 출발했지만 충남 공주시, 논산시, 부여군이 달려들어 서로 자기 지역에 역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3개 지역 사이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정부는 각 지역에서 공평하게 직선거리로 20km 안팎 떨어진 산속에 185억 원을 투입해 역을 짓기로 했다. 이 결과 공주역은 하루 평균 이용객이 KTX 1편(965석)의 3분의 1을 겨우 채울 정도의 380명에 불과한 ‘유령역’으로 전락했다.

공주역은 ‘무조건 따고 보자’는 식의 무리한 국책사업 경쟁이 불러온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은 사례일 뿐이다. 영남권 신공항처럼 10년을 끌어오며 국민을 분열시키고 인프라 투자의 타이밍을 늦추는 일이 반복해서 벌어진다.

영남권 신공항 논란을 계기로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 자원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제로섬 국책사업 유치 경쟁’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 갈등-낭비 불러오는 국책사업 경쟁

정치권과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등이 부추기는 ‘국책사업 포퓰리즘’이 예산 낭비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항이나 고속철도와 같은 인프라나 대형 행사를 유치하면 국비 지원 등을 통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선거용 치적까지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프라 건설과 행사 유치 이후 유지 관리 등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지역경제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지방공항과 국제스포츠 행사다. 3567억 원이 투입된 강원 양양공항은 부산∼양양 간 18인승 에어택시가 하루 1회 오가는 게 전부다. 2014년 아시아경기를 개최한 인천은 기존 경기장을 활용하라는 정부 권고에도 무리하게 새 경기장을 짓다가 1조500억 원의 빚을 짊어져야 했다.

국책사업 포퓰리즘이 자극한 ‘핌피(PIMFY·Please In My Front Yard·내 지역에 예산을 끌어오려는 이기주의) 현상’은 지역 간 갈등을 키워 사회 통합은 물론이고 사업 추진까지 어렵게 한다. 현재 항공정비단지(MRO) 후보 지역 선정은 충북 청주시, 경남 사천시 간의 대립으로 2년 가까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거꾸로 기피 시설을 짓는 국책사업은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으로 지역 간 밀어내기가 극심하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은 1983년 사업 추진 이후 33년 만에 기본계획을 마련했지만 지역 간의 갈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 예산 씀씀이 효율성 최하위권

대형 국책사업들이 지역 이기주의에 휘둘리다 보니 정부 재정 집행과 나라 살림의 효율성도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지출의 효율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8위에 머물렀다. 좁은 국토에 높은 토지보상비를 내주면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교통 인프라 등을 조밀하게 건설해 투자 효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였다.

정부 내부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한국행정학회에서 제출받은 ‘SOC 사업 예산 낭비 심층 분석’ 용역 보고서에서 “정치권 및 지자체의 무분별한 신규 사업 등으로 정작 추진돼야 할 사업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국책사업과 관련한 갈등을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산 심의권을 갖고 있는 기재부가 정치권 등의 불합리한 예산 요구를 정무적 이유 등을 대면서 충분한 검토 없이 수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 국책사업 결정 시스템 근본적으로 바꿔야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국책사업 결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소모적 경쟁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재정 낭비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중앙정부 예산이라는 한정된 파이를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심지어 과격시위까지 나서는 폐해를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정연정 배재대 공공행정학과 교수는 “덜컥 공약을 내걸었다가 당선된 뒤 감당할 수 없으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되는 만큼 사전에 공약 타당성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과 공개적인 논의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비가 들어가는 국책사업을 ‘로또’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한 보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해법도 제시됐다. 경제적 이득이 큰 선호 사업과 쓰레기매립장 등 기피시설 관련 사업을 패키지로 묶을 경우 극단적 갈등을 완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자체가 요구하는 SOC 사업의 지방비 투입 비율을 지금보다 높이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정치권 공약의 옥석을 가리는 사후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선거가 끝나면 공신력 있는 정부기관이 공약 타당성 검증기구를 설치해 당선자의 공약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상훈 january@donga.com / 홍수영 기자
#지역갈등#국론분열#국책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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